하나의 철학적 기획, ‘통일평화론’ -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곽 태 환
1. 서론
한 여름이다. 큰 비가 내렸고, 이 맘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리네 더위가 더욱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저마다 산으로 바다로 시원한 바람을 구하러 가는 이들의 모습은 어느덧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덥다 못해 찌는 듯한 기분까지 드는 요즘의 기운과는 다르게 남과 북의 오늘은 더욱 더 찬바람이다. 계속해서 전해져 오는 북쪽에서의 이야기들은 점점 ‘재미없는’ 소식들로 가득해져가고 있다. 가뜩이나 머리 아픈 주제에 진전이 없는 현실. 비관적인 상황이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춰서는 아니 되었다. 그러한 사고의 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에 이르러서 ‘대북’이나 ‘남북’이란 단어에 ‘조정기’란 단어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추세에 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더 이상의 발전이 어려워진 남북관계를 두고, 과거를 돌이켜보며, 또한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진일보를 꾀할 것에 대한 의지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조정기’에 이르러 제시된 논의 중 하나인 ‘한반도 평화체제 구현 방안’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 대해 탐구하고, 그것이 오늘날의 상황과 부합하는지에 대해 비판1)하고자 한다. 또한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궁극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개념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동의 내지 지지를 이끌어 내고자 한다. 이는 향후 대북정책의 수립에 있어 기본적 논의로서도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2. 본론
2-1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철학적 고찰
1953년 이래로 계속해서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반도는 계속해서 ‘전시(戰時)’ 상황이다. 물론 휴전이 장기화 되면서 ‘사실상의 종전’으로 여겨지고는 있지만, 자연상태로2)의 회귀가 언제든지 가능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①선군평화론
이와 같이, 영구적인 평화가 보장되지 않은 한반도의 특수성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의 실현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선군평화론이다.3) 선군평화론은 문자 그대로, 군(軍)을 통한 평화구상을 말한다. 여기서 군이라 함은 군사력을 의미하며 그를 앞세운다는 것은 무력을 통한, 곧 전쟁을 통한 평화의 달성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평화론은 그를 이뤄나가는 수단 자체에서부터 ‘평화’와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기에 평화체제를 향한 프로세스로 삼기에는 분명 어려움이 있다. 이는 국가의 통치권이 갖는 영광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에조차 무관심한 이들이나 갖는 어리석은 생각이다.4)
②영구평화론
선군평화론이 ‘하드파워’를 통한 평화체제로의 기획이었다면, ‘소프트파워’5)를 통한 평화체제로의 기획 또한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구평화론과 민주평화론(시장평화)이다. 영구평화는 칸트의 저작으로 ‘영구평화를 위한 예비조항’과 ‘영구평화를 위한 확정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립국가의 주권보장과 폭력의 불가원칙을 주요 골자로 한다.6) 이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 헌법과도 닮아 있는 모습인데7) 칸트의 저작이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수행한 것인가에 대한 추측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상당한 시간적 차이로 인해, 전체적인 내용이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상’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국제기구의 창설에 대한 부분까지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놀라운 혜안을 보여준 바,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③민주평화론(시장평화론)
영구평화론에는 ‘국가 간의 영구평화를 위한 확정조항’에 “모든 국가의 시민적 정치 체제는 공화 정체이어야 한다.8)”는 평화체제구성을 위한 조건이 명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기인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체계화 된 것이 바로 민주평화론이다. 이는 자유주의 국제주의자들의 사상적 중심을 이루는데, 자유주의 정부는 다른 자유주의 정부와의 관계에서 신중함을 보이지만,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조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9) 여기서 자유주의 정부란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의 정체(政體)로서 삼는 공동체를 말한다. 이는 평화를 사랑하고 수호하는 선한국가와, 전쟁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며 폭력을 선동하는 악한국가10)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한편 이 이론은 시장평화론으로 확대되기까지 하였는데, 대북정책을 설정함에 있어 응용의 대상이 된 민주평화론이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상대국가를 기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 되는 가운데, 대안으로서 제시된 것이었다.11) 북한을 시장으로 이끌어 내고,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를 연습하게 하므로 평화의 싹을 틔운다는 것이 그 구체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시장경제와 민주정치가 ‘거의’ 동일시되는 상황에서, 양자는 ‘거의’ 같은 개념의 이론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며,12) 이 두 개념이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우위 이론이라는 확신이 용인되는 분위기 속에 있다.
2-2 대북정책 설정에서 나타난 우위 이론의 발현과 그 구체화
대립과 대결의 시대에서 벗어나, 대화와 화해의 시대가 본격화된 김대중 정부시절부터 나타났던 정책들을 살펴보면, ‘민주평화론’을 원천적인 철학으로서 응용하였다는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그를 계승하였다는 노무현 정부의 ‘대북포용정책’, 더불어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13)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나 시장경제를 북한사회에 도입시켜 세계무대로 이끌어 내, 선한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다른 국가와의 마찰에서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힘’에 의한 방법보다는 ‘대화’를 통한 방법이 낫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 북한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변모시키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다.
2-3 민주평화비판 ; 민주평화론을 넘어 ‘통일평화론’으로
‘민주평화론’이란 반석 위에 지은 우리의 대북정책은 실로 ‘그럴 듯’하다. 북한을 시장경제로 유도해 그 물결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한다면, 그들 스스로 ‘투자 부적격’ 선고를 받지 않기 위해 자발적인 노력을 다 할 것이라는 기대, 북한을 민주국가로 이끌어 간다면, 그들 스스로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힘’에 의한 해결을 피할 것이라는 기대가 뭇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오류가 내재되어 있다.
북한은 남한과 함께,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어나가야 할 논의당사자이다. 그러나 당사자 중 하나가 통일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거나, 그러할 가능성조차 없는 상황으로 나아갈 경우, 통일은 ‘영원한 망상’에 지나고 말 것이다. 민주평화론의 실현은 우리의 소원을 ‘영원한 망상’으로 빠뜨릴 요소가 다분하다. 이를테면 북한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여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고 가정하여 보자. 이 경우 분명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체제가 가시권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북한이 더 이상 우리와의 통일을 원치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국가와 국가가 합동된다는 것이며, 이는 중첩적 합의14)의 실현을 의미한다. 체제가 같은 두 국가의 통일은, 구조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민주정 하의 북한 주민들이 타 국가와의 통일을 원하겠는가. ‘북조선민주공화국’의 위정자들은, ‘대한민국’과의 통일을 과연 염두에 두고자 하겠는가. 그 구성원들이 가진 다양한 형태의 기득권이 침해받는 상황 속에서, 민주화 된 북한이 남한과의 통일을 이루려 한다는 것은, 마치 동남아의 어느 국가가 우리와 통일을 이룰 수도 있다는 주장과 비슷한 수준의 가정이다. 정리하여 논하면,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통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의 자유, 시장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흐름으로, 민주평화론의 달성 이후, 우리가 한반도 이북지역의 공동체와 모색할 수 있는 작업은, 자국의 이익을 보장받고자 체결하는 ‘협정(Agreement)’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북한을 민주화 시킨다거나, 시장경제로의 유도를 꾀한다거나 하는 작업들은 분단의 고착화 정도의 수준이 아닌, 개별 국가의 존속과 존립을 불러올 것이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상정한 상태에서 평화체제의 구축을 꾀하고자 한다면 민주화가 아닌, ‘통일’ 자체가 목표로서 전제되어야만 한다. 민주평화론이 아닌 ‘통일평화론’ 이후로의 정립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Interval ; 공허와 맹목의 시대 속에서
북한의 잇따른 부정적 움직임으로 인해 남한 내부에서의 대북정책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는 오늘에 와있다.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혹은 ‘옳았던’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다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어찌 보면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햇볕정책이든, 포용정책이든, 비핵개방 3000이든 원초적으로는 영구평화나 민주평화에 그 근간을 둔 이론들의 대립이었다. 논쟁의 핵심은 단순히 누가 그것을 어떻게 구체화하여 발현하였는가가 되어버렸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쪽이 틀리면 저쪽도 맞을 수 없고, 저쪽이 맞으면 이쪽도 틀릴 수 없는 식의 모순적 논쟁, 곧 소모적 논쟁만이 있을 뿐이었다.
본문에서도 잠시 다루었던 영구평화론의 구상자인 칸트는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15)라는 주장을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전개해나갔다. 돌이켜보면 그동안의 대북정책논쟁이라 하는 것은 내용 없는 사고의 발현이었으며, 또한 개념 없는 직관의 표출이었다. 고로 우리의 그것은, 공허와 맹목으로 가득 차있었다 하여도 무관할 정도였다. 철학 없는 사회가 가져온 시대의 산물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뼈아픈 우리시대의 실책이기에 너무나도 안타까운 오늘이다.
3. 결론
지방으로 이동하던 중 휴게소에 들렀다. 서비스의 일환인지 장내에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로그램 진행자가 다음과 같은 멘트를 던졌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억류된 미국기자 두 명을 자국으로 데려갔습니다. 자, 그렇다면 며칠 전 나포된 우리 어선의 선원들은 누가 데리고 올까요?”
그 사람의 ‘직책’을 너무 중시한 까닭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렇다 할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비교적 긍정적이었던 남북관계를 이끌어낸 전임 대통령 중 한분은 악화된 건강으로 병상에 있고, 또 다른 한분은 먼 세상으로 학처럼 날아갔다. 그렇다면 임기를 수행하고 있는 현직 대통령에게 그와 같은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현 정부의 대북관과 그의 발현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더라도, 작금의 관계가 관계인만큼 그 역시 어려운 것이 사실일 것이다.
‘조정기’란 단어가 내포하고 있듯, 오늘의 남북관계는 숨고르기 중이다. 지금까지의 흐름이 가파른 상승이었든지 혹은 하락이었든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앞서서도 밝혔듯이, 이러한 ‘조정기’ 속의 움직임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분석하며, 미래를 구상하는데 그 주안점을 맞추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계속해서 열거하였듯이 우리시대 대북정책의 약점은, 그 철학적 기초를 잘못 설정한 데에서 기인하였다고 본다. 응용대상 자체가 잘못 되었다기보다는 그의 해석과 적용이 문제였다. 이제는 진정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의 움직임을 이끌어갈 원칙부터 설정하고 그를 통한 정책발현을 모색해야 할 때다.
닭의 목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가. 남북의 통일 역시 그와 같이 자연스러운 우리시대의 섭리라고 확신한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남과 북은 다시 하나로 돌아갈 것이다. 오직 통일만이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는 ‘통일평화론’의 기본입장을 견지하며, 통일의 그 날을 준비하는 공동체의 성원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1) 여기서 ‘비판’이란 독일어 Kritik(비판)으로 이는 ‘조사하다(untersuchen)’, '검사하다(prufen)'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Krinein에서 파생되었다. 2)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평화 상태는 자연 상태가 아니다. 자연 상태란 전쟁의 상태이다.” 칸트, 이한구 역,「영구 평화론」p. 25 (서울 : 서광사, 2008) 3) 북한의 ‘선군정치’에서 발현된 선군평화론을 언급한 것은 첫째, 그것의 부당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둘째, 그것의 불가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셋째, 제기된 이론을 모두 소개함으로서 글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4) 불가리아의 어느 국왕은 그리스 황제가 국민을 생각하는 선량한 마음에서 결투로써 분쟁을 해결하고자 제안했던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부젓가락을 가지고 있는 대장장이는 이글거리는 쇳덩이를 불 속에서 맨손으로 끄집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5) 국역하면 ‘연성국력’ 정도가 될 것이다. 6) 칸트, 이한구 역,「영구 평화론」p. 25 (서울 : 서광사, 2008)
7) 1. 영토성: 인류는 주로 고정된 국경을 가진 배타적인 영토적 공동체로 나누어져 있다. 2. 주권: 국경 내에서 국가 또는 정부는 최고의 무조건적이며, 배타적인 정치적 ․ 법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3. 자율성: 국가는 국내 영역을 외부 세계와 구분하는 고정된 국경 내에서 정치, 사회, 경제행위의 자율적 담지자로 보인다. 존 베일리스 외, 하영선 외 역, 「세계정치론」p. 38 (서울: 을유문화사, 2006) 8) 칸트, 이한구 역, 위의 책 p. 26 (서울 : 서광사, 2008) 9) 존 베일리스 외, 하영선 외 역, 「세계정치론」p. 805 (서울: 을유문화사, 2006) 10) 이수석,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2008-1 ‘한반도평화체제’ 수업자료
11) 조성렬, ‘선군평화론과 민주평화론을 넘어’ 2006. 7. 26 국정브리핑 칼럼
12) 민주평화론과 시장평화론이 거의 동일하다고 보는 본인은, 앞으로의 내용전개에서도 ‘민주평화론≒시장평화론’이라는 인식을 계속해서 유지할 것이며, 그를 표기함에 있어서는 ‘민주평화론’이라 서술할 것이다. 13)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에 대해 약속한다면 북한의 국민소득이 3천불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것.
14) 존 롤즈, 장동진 역, 「정치적 자유주의」p.165 (경기 파주 : 동명사, 1998) 15) 칸트, 최재희 역, 「순수이성비판」p.97 (서울 : 박영사, 1988) <저작권자: 성통만사, 무단 전재 및 불법 복제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