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시녀 –국가안전보위부
비운을 맞은 권력의 수장들
북한 수령독재체제를 구축한 중심에는 그의 손과 발이 되었던 국가안전보위부가 있다. 철권통치체제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안전보위부의 흔적은 오로지 김일성 김정일의 권위와 안녕만을 위한 투쟁의 피로 얼룩졌다. 하지만, 그 수장들은 권력암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살과 의문사(?)로 비참한 운명을 고했다.
초대 국가정치보위부장을 했던 김병하는 자살했고, 2대 국가보위부장이었던 이진수는 의문사(?)를 당했고, 제1부부장이었던 김영룡도 자살하는 등 비운의 운명을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졌다.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를 본떠 조직된 국가정치보위부(국가안전보위부 전신. 73년 사회안전부로부터 분리됨)에 김일성은 ‘수령의 보위대, 친위대’라는 신임을 주었다. 김일성의 독재체제를 구축하는데 국가보위부는 혼신의 노력을 다 했고, 그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을 처벌했다. 김일성은 60년대 후반까지 남로당파, 소련파, 연안파 등 반대파들을 차례로 숙청하고 마지막 반대파인 ‘갑산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이 시기에 6,000여명의 반대파들을 처형했고, 정치범 수용소에 가둔 사람만도 7만 명에 달한다.
1967년 당중앙위 조직비서(당 2인자) 박금철, 선전비서 이효순을 비롯한 갑산파와 전(前)여맹위원장 박정애(초대 북조선 공산당 당수 김용범의 처), 1968년 숙청된 민족보위상 김창봉, 인민군 총정치국장 허봉학도 대부분 정치범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권력다툼에서 정보기관들이 추구하는 것은 권력의 위세와 권력확장이다. 국가정치보위부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당의 지도를 거부하고 사회안전기관을 우습게 여기는 특권이 생겨나게 되었다.
84년 2월 초대 국가정치보위부장 김병하의 사망은 공포의 대명사였던 정치보위부의 위상이 권력서열에서 격하된 계기가 되었고, 정보공작정치의 가면이 세상에 벗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초대 정치보위부장 김병하의 부상(浮上), 당의유일사상체제 확립과 맞물려
국가보위부가 사회안전부(경찰해당)로부터 독립되던 시기는 김일성 김정일의 절대권력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던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 발표와 맞물린다.
72년 헌법을 개정하고 수상제를 수령제로 개편했고, 김정일은 74년 2월 당 선전일꾼들 앞에서 ‘10대원칙’을 노동당 최고 강령으로 채택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수령독재체제로 가기 위한 첫 번째 수순인 셈이다. 그에 걸맞게 10대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한 절대적인 권력기구가 필요했다.
70년대 초까지 반대파들에 대한 숙청이 끝난 후, 북한내부에는 더 이상 당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대파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전당적, 전 인민적 감시체계를 세우고 주민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반당적 기미를 발견하고 맹아단계에서 잘라버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김일성은 1973년 2월15일 사회안전부로부터 국가정치보위부(국가보위부 전신)를 독립시키고, 당시 사회안전부장이던 김병하를 초대 국가정치보위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국가정치보위부를 국가와 인민의 안보를 위한 권력기구가 아니라 철두철미 김일성∙김정일 개인을 위한 사조직으로 만든 주역이다. 그는 오로지 두 독재자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헌신을 다해왔다.
갓 탄생한 정치보위부의 구호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중앙위원회를 목숨으로 사수하자”였다. 이 구호는 1992년 11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동지를 위하여 한 목숨 바쳐 싸우자”로 바뀔 때까지 정치보위기관의 공식구호로 등장했다.
김병하는 계급적 원칙이 강하고 뛰어난 경호감각, 순발력을 지닌 전형적인 ‘정보맨’이었다. 그는 보위부 일꾼들을 소련에 파견해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정보활동 방식과 테러방지를 심층적으로 연구해 북한에 보급한 전문가였다.
자카르타 폭탄테러 사건에서 김일성의 눈도장 받아
김병하가 초대 보위부장으로 발탁된 데는 그의 충성을 검증 받았던 스토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년 23세의 김정일이 김일성을 보좌하여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던 1965년 김병하는 이 두 사람의 호위사업을 맡게 되었다.
당시 인민군 호위국 부국장이었던 김병하는 테러에 대비해 회담장에서 서게 될 김일성의 위치와 좌석배치, 실내 도청장치 유무상태에 이르기까지 주도 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김정일의 비준(결재)을 받았다.
이 과정에 폭탄테러를 사전에 방지해 김일성 김정일로부터 눈도장을 확실히 받았다는 것이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김일성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대통령 궁전을 방문하는 시간에 궁전에서 폭탄테러가 있었다. 이 테러가 수카르노 정권을 노린 반대파들의 소행인지, 아니면 김일성을 노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김병하가 김일성이 궁전에 들어설 차례에 스카르노 대통령 부관을 먼저 들여보내는 순간, 폭탄이 터져 부관을 포함해 여러 명이 사망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김병하는 호위국 부국장의 직책에서 단숨에 사회안전부장으로, 초대 정치보위부장으로 승승장구 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김병하가 숙청되자, 중앙당 검열과정에서 “김병하가 당의 신임을 얻기 위해 자카르타 폭탄사건과 ‘독바늘’사건도 조작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권력의 희생물이 항상 얻게 되는 불명예스러운 풍문이었다. ‘독바늘 사건’은 당시 국가정치보위부 출신 보위원들속에서 회자되고 있던 흥미로운 스토리였다.
사연인즉 김병하가 인도네시아 방문시 김일성이 앉을 방석에서 독바늘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경호측에서 검사할 때는 발견되지 않았던 ‘독바늘’이 김병하가 발견했다는 의문은 당시 잠정의문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가 숙청되자, 사람들은 “김병하가 당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바늘을 숨겨놓고 발견한 것처럼 위장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물에 빠진 놈 꼭대기를 누르는 격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조직으로 급부상, 김일성의 지시도 제멋대로 왜곡해
정치보위부 권력을 장악한 김병하는 이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첩보기관으로 격상시켰다. 우선 체제에 반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신분을 새롭게 구성하고, 그들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추방을 단행했다. 북한주민들의 계급성분을 핵심군중과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규정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정치보위부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원칙’에 위배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추호도 용서가 없었다. 술상에서 김일성 김정일에 대해 불평을 했다고 정치범 수용소로 끌어가고, ‘노동신문’으로 담배를 말아 피웠다고 수용소로 끌어갔다.
이때를 회상하여 김병하와 함께 국가정치보위부 세포에서 근무한바 있는 정명학은 “우리제도가 이처럼 든든한 것은 그때 계급적 원수들의 잔재를 뽑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김병하의 권력야심과 자만심은 도를 넘었다. 그는 보위부에 대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시와 말씀 같은 것도 제멋대로 왜곡전달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근무했던 국가정치보위원들의 말에 따르면 “김병하는 자기 의도대로 보위부를 움직이기 위해 수령님의 교시라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그대로 내리 먹였다”고 말했다.
정치보위원들은 각종 1호 행사(김일성 김정일 행사)에 참가할 인원들을 선발제한 할 수 있는 권한은 당일꾼들을 훨씬 능가했다. 이 때문에 노동당과 보위부는 빈번히 마찰을 빚었다. 당에서는 “보위부가 너무 권한을 행사한다”고 반발했다. 원래 정치보위부가 당의 지시를 받아 군중에 대한 문제처리를 하게 되었으나, ‘너무 커진’ 보위부는 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처리한 것이다.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1980년대 초 김일성이 평안남도 남흥화학연합기업소를 방문했을 때, 한 인텔리를 행사에서 배제시켜 당으로부터 신소를 받았을 때였다. 연합기업소 보위부장은 일제시기 공부한 한 공로 있는 인텔리를 신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김일성이 참가한 행사참가자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보위부의 권한남발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연합기업소 책임비서는 편지를 직접 김정일에게 올리고, “보위부가 당의 군중노선을 위반하고 있다”고 신소 했다.
이 편지를 받은 김정일은 정치보위부에 엄중 경고를 내리고, 그 인텔리를 따로 평양에 불러다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등 배려를 돌려주었다.
보위부에 대한 노동당의 신소가 빈발하자, 김정일은 중앙당 조직지도부 8과(보위부 담당) 부부장을 책임자로 하는 특별그루빠(태스크포스)를 파견해 정치보위부에 대한 집중 검열을 진행하게 했다.
김병하, 반당반혁명분자로 몰려 자살
국가정치보위부에 대한 특별그루빠의 검열은 ‘10대원칙 재토의, 재검토 사업’으로 시작됐다. ‘10대원칙 재토의, 재검토 사업’이란 원래 정치보위부가 군중을 상대로 10대원칙 관철을 따지던 것을 오히려 노동당이 정치보위부를 상대로 10대원칙 관철을 재검토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배낭을 바꿔 멘 셈이다.
김정일의 특별지시로 진행되는 특별그루빠 검열에 걸리면 살아남기 어렵다. 검열그루빠는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기 위해 혹독하게 대상을 검열한다. 봉건시대에 비유하자면 임금의 어명을 받고 내려온 ‘암행어사’들인 것이다.
중앙당 검열그루빠가 들이닥치자, 김병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약화를 이유로 전면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검열에 동원되었던 조직지도부 검열성원들은 국가정치보위부 부부장, 과장 등 과거 당에 대고 큰 소리를 치던 요직의 간부들을 연이어 체포하면서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고 한다. “그처럼 도고하던 국가정치보위부도 고양이 앞에 쥐 신세가 되어 부들부들 떨었다”고 당시 목격자들은 전했다.
당의유일사상체계를 위반하고 제멋대로 김일성의 지시를 왜곡하던 김병하는 죄행이 드러나고, 복잡한 여성편력까지 나오자 84년 2월 사무실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자살의 길을 택했다.
독재자가 쥐어준 칼을 가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김병하는 결국 그 독재의 희생물이 되었다. 국가정치보위부를 숙청할 당시 김정일은 “김병하는 당의 신임을 배반한 ‘베리야(스탈린 시절 소련 비밀경찰국장)’ 같은 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이들에게 ‘반당반혁명분자’의 감투를 씌워 숙청하고 단 한 사람도 석방시키지 않았다.
2대 국가보위부장 이진수, 반탐∙국경봉쇄에 주력
1984년 김병하에 이어 사회안전부장을 하던 이진수가 2대 국가보위부(국가안전보위부의 전신. 84년 국가보위부로 개칭)장으로 임명되었다. 한때 노동당의 권한을 침범했던 국가정치보위부의 권한이 대거 축소되었다. 오직 당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정치보위부는 당의 권력을 넘보지 말라는 의미에서 ‘정치’자를 빼앗겼고, 반 간첩투쟁만 하라는 의미에서 ‘국가보위부’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이진수 역시 해방직후부터 보안기관에 근무해온 베떼랑 정보전문가였다. 사회안전부장이 국가보위부장으로 옮긴 것은 당의 신임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사회안전부는 약 5만 명 인원을 가진 국가보위부 보다 3배에 달하는 인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사회치안질서를 다룬다는 임무로 볼 때 수령보위와 당의유일사상체제를 직접 관장하는 보위부 보다 대우가 반급 낮다. 때문에 보위원들과 안전원들 사이에는 누가 수령의 신임을 더 받는가를 놓고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다.
이진수는 해방 직후 보안서원(경찰)으로 발탁되어 프롤레타리아 독재기관에 발을 들여놓았다. 남포 보안간부훈련소를 졸업하고 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이 조직된 후에는 김일성을 호위하는 경위대원을 지냈다는 설이 있다. 8.15 해방 후 항일빨치산 출신들이 건국시기에 권력층에 포진되었다면, 경위대원 출신의 이진수, 연형묵 등은 70~80년대 북한권력층의 중심축을 이루었다.
1957년 9월 최고검찰소 부소장에 오른 이진수는 당의 계급노선을 관철하는 제 1선에서 승진의 가도를 달렸다. 1973년 안전부와 보위부가 갈라지면서 김병하는 정치보위부장으로, 이진수는 사회안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같은 계급초소에서 직위를 계승한 동지이자, 라이벌이기도 했다.
취임 후, 이진수는 먼저 반탐(反探)정 활동과 국경봉쇄를 강화했다. 국가보위부 제2국(반탐국)에는 유럽, 북미, 동아시아를 담당하는 해외반탐부서가 있다.
이 공작파트는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통일전선부, 작전부, 대외연락부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보위부 해외반탐국이 조직되면서 일본, 중국, 홍콩, 마카오 등지에 해외반탐 조직이 꾸려지고, 그들은 외교대표부와 대사관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신분은 대체로 무역일꾼, 식당 및 해외출장소 직원 등 비교적 활동적인 신분이다.
특히 미국, 일본, 남한 등 해외에 친척을 두고 있는 주민들을 빠짐없이 장악하고 감시하고 있으며, 북한을 방문하는 친척들과 해외로 나가는 주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의 공안부, 러시아 안전부와 맺은 협정에 따라 북-중, 북-러 국경지역에서 발생하는 특수 도주자에 대해서는 보위부원들을 직접 파견, 체포할 수 있도록 상대국 공안기관과의 협조체계도 보강했다.
이진수의 가장 큰 공적은 국경과 항만, 공항세관 단속제도를 개혁한 것이다. 과거 사회안전부에서 맡았던 국경경비임무와 국경통행검사 임무가 보위부에 이관되면서 국경경비총국과 국경통행검사소의 군복이 일거에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보위부의 권위가 하락함에 따라 이진수를 따라 국가보위부에 넘어 온 국경통행검사소 출신 보위원들은 이진수를 원망하기도 했다.
국가보위부는 반체제 행위자 및 간첩수사, 정치범수용소 관리, 공항, 항만 등의 출입국 통제 및 수출입품 검사와 밀수 단속, 해외정보 수집 및 공작, 호위사령부와 협조 아래 김일성 김정일을 보위하는 호위사업(5총국)까지 맡는 등 종합적인 정보기관으로 면모를 쇄신했다.
그러나 이진수도 1987년 10월 지방 순시를 내려갔다가 황해남도 태탄군 보위부 침실에서 밤나무 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그의 사망을 두고 가스 질식사, 교통사고 설 등 많았지만, 그의 사인(死因)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다. 북한은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생하는 삶’ 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공석으로 남은 국가안전보위부장, 김정일이 직접 맡아
이진수가 죽은 후 국가보위부장 자리는 줄곧 공석으로 남아 있다. 김정일은 국가안전보위부를 제1부부장 체제로 운영하고 내부사업은 자신이 직접 장악 통제하고 있다.
당중앙위 계응태 공안담당비서를 비롯한 간부들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정일에게 보위부장의 필요성에 대해 제기했지만, 그때마다 김정일은 “왜 보위부장이 꼭 필요한가?”며 그 제의를 일축했다. 김정일은 그 밑에 자기와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생인 김영룡을 제1 부부장에 앉히고, 국가안전보위부를 자신의 사조직, 가병으로 만들어 놓았다.
김영룡은 김정일과 같은 1942년생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을 등용시키는 간부사업 원칙에 따라 김영룡은 1983년에 국가보위부 부부장에 올랐고, 1991년부터 국가안전보위부 제 1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김정일과 김영룡의 사이도 아주 각별했다. 1993년 북한에서는 ‘장군님의 숭고한 당조직 관념’이라는 당 기풍확립 운동이 벌어진바 있다. 내용인즉 김정일이 아침 9시, ‘중요국가기관’에 전화를 걸었는데, 책임일꾼이 부재중이었다. 김정일의 전화를 받은 김영룡의 서기는 ‘책임일꾼이 세포비서에게 당비(黨費)를 바치러 갔다’고 정중히 보고했다.
그러자 당장 찾아오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5분이면 될까? 5분 있다 다시 전화하지”라고 김정일이 답했다 한다. 이것을 두고 김정일의 당 조직관념이 높다며 전 당과 전 사회에 일반화하도록 한 운동이다.
이때 강연제강에 등장한 ‘중요부서의 책임일꾼’이 바로 김영룡이다. 서기의 부름을 받고 황급히 올라와 김정일의 전화를 받은 김영룡은 김정일을 칭송하는 덕성실기를 쓰고 북한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영룡이 취임한 후, 김정일은 1992년 11월 12일 국가보위부를 방문해 “소련과 동구라파 나라들이 다 망했다. 우리가 지금 한 순간을 놓치면 내일은 쓴맛을 본다. 사회주의를 버리면 첫 번째 숙청대상은 당과 보위기관 일꾼들이다”며 경각심을 강조했다.
1990년대 들어 소련 및 동구권이 붕괴되고, 1992년 한중(韓中)수교는 북한을 극도로 긴장시켰다. 변화하는 정세의 흐름을 타고 평양과 청진, 신의주를 비롯한 북한 주요도시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반대하는 삐라사건과 낙서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김정일은 국가보위부를 방문하고 국가안전보위부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간첩잡이에 치중했던 보위부의 임무를 다시 자기만을 보위하는 ‘보위대’로 확인하기 위한 작업인 것이었다. 우선 ‘보위기관 현대화’ 방침에 따라 김정일과 직통전화∙직접보고 체계를 세웠다. 보위통신체계는 단독으로 운영시켰고, 수령의 권위를 해치는 요소들을 적발할 수 있는 지문감식기, 필적감식기를 해외에서 구입했다.
국가안전보위부의 하락, 권력기관들의 충성심 경쟁 가열
국가안전보위부는 ‘30번’ ‘40번’ 숙청작업에 돌입했다. 보위기관 비밀대호(암호) 가운데 ‘30번’은 소련의 주구(첩자)이고, ‘40번’은 중국 주구를 이른다. 당시 북한에서 소련과 중국에 유학 가는 사람은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유학생들은 귀국 후에 상대국에 매수되었다는 이유로 모조리 숙청되었다.
1960년대부터 북한은 군사대학 재학생과 졸업생들 중 머리가 총명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소련에 있는 ‘푸룬제 군사아카데미’에 보내 국방과학과 군사장비에 정통한 엘리트들을 교육시켰다. 30, 40번 숙청사업의 첫 번째 대상은 그 유학생들이었다.
유학생들이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에 매수되어 첩자가 된 후, KGB의 지시에 따라 북한 수뇌부를 없애고 군사반란을 획책했다는 것이 숙청의 원인이었다.
아카데미출신 유학생들은 귀국하여 이미 군부의 요직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국가안전보위부의 권한 밖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단서가 발견되면 인민군 보위사령부와 협력 수사해야 하나, 정보기관들 사이의 경쟁적인 충성심과 자기기관 본위주의 때문에 협력이 안되고 수사가 답보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인민군 보위국(국장 원응희, 2004년 사망)은 1993년 초 소련유학생출신 11명 숙청으로 시작하여 과거 소련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조사, 체포,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어갔다. 이로 인해 인민군 보위국은 단번에 보위사령부로 승격되었다. 더욱이 1995년 6월에 있은 ‘6군단사건’과 97년 황해제철소 노동자 폭동사건을 진압하여 김정일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중장에서 대장으로 하루아침에 승진한 원응희 보위사령관은 1997년 ‘최룡해 사로청사건’을 처리하며 북한 제1의 무소불위(無所不爲) 세력으로 등장했다.
한편 사회치안, 행정기관 단속에 치중했던 사회안전부는 1997년 10월 당중앙위 전 농업비서 서관히, 전 부부장 이창선, 피창린 등의 과거경력을 들추어내 반당 반혁명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면서 국가안전보위부를 서서히 밀어내면서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극도의 빈궁에 빠진 주민들은 눈만 뜨면 “오늘은 누가 간첩, 내일은 누가 반동”이라는 공포에 질려 갈팡질팡했고, 권력을 틀어쥔 충성분자들은 경쟁적으로 사람잡이를 단행했다. 이러한 권력다툼 속에 경쟁력이 떨어진 국가안전보위부는 자기의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1997년 ‘중앙사로청사건’을 보위사령부에 뺏기면서 더욱 무능해졌다. 당시 보위부가 사건제보를 먼저 받았지만, 김일성의 빨치산전우 최현의 아들인 최룡해, 그리고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이 연루된 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우유부단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보위사령부는 김정일에게 “국가안전보위부가 ‘중앙사로청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안면정실관계 때문에 계급투쟁에서 태공(태만)했다”고 일러바쳤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또한 중국주재 국가안전보위부 해외반탐(反探)조직을 노출시키는 실책을 저질렀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신흥무역회사’를 통해 외화를 벌어 기술장비와 대내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해 왔다. 이름은 ‘무역회사’를 걸었지만, 직원들 가운데에는 보위부 해외반탐국 소속 312호 공작원들이 있었다. 이러한 해외반탐조직은 심양과 연길, 북경을 비롯한 중국각지에 널려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들이 남한 안기부에 매수되었다고 한다.
국가안전보위부는 1997년 12월 중앙당 집중검열을 받게 되었다. 부부장들은 물론 각도의 부장, 부부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검열을 받았다. 평안북도만 하여도 부장 최만흥은 철직되었고, 반탐부부장 정찬균은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등 일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중앙당 집중총화가 시작되자, 김영룡은 도저히 소생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영룡의 죽음이 자살인지, 처형인지에 대해서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전 국가안전보위부 요원 백명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