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며 자유를 찾기까지(2)


눈물을 펑펑 쏟아낸 이방인

 

중국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처음으로 하느님 앞에 섰던 생각이 난다. 돈화시 황니허로 들어가기 전 연길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민박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연길시내를 구경 삼아 한 바퀴 도는데 교회가 보였다. 강기슭에 자리잡은 교회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천주교인 것 같았다. 목사의 설교는 죄인에 대한 용서였다. “하느님이 흘린 보혈은 이 세상 죄인들의 죄를 씻어주고….”라는 설교가 시작되자, 꼭 내가 그 설교 속의 죄인으로 타매당하는 것 같아 눈물이 쏟아졌다. 좌중에 앉았던 사람들은 의아한 눈으로 촌놈행상을 한 나를 바라보며 속죄를 하는 내 등을 다독였고, 손수건을 건넸다.

 

고향을 떠난 지 일년이 되는 때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아주 깊었다. 용정에서 양을 몰고 다닐 때도 바람불고, 눈비 오는 날에는 산골짜기 웅덩이에 쭈그리고 앉아 꺼이 꺼이 울기를 수십 번. 평소 눈물이 없던 나는 김일성 사망했을 때도 조문상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아 침을 발라가며 눈물자국을 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등지고 외국에서 쫓겨 다니자니, 그냥 눈물이 펑펑 나왔다.

 

설교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질 무렵 나는 목사를 만나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목사실에 내려가 지나가는 목사를 막고 “목사님, 한번 좀 만나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목사는 나의 행상을 보고 “저기 전도사를 만나세요”라고 총총히 방으로 들어갔다. 전도사는 “목사님은 바빠 만날 수 없다”며 찾아온 용건을 묻는 것이다. 나는 탈북자임을 밝히고, 한국에 가고 싶으니, 어떻게 해야 좋겠는지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전도사는 “탈북자들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면 돈도 주고, 밥도 주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탈북자들을 보호하면 경찰이 단속하니 잠자리까지는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시내는 도무지 불안전하여 내가 있을 만한 곳이 못되었다. 이렇게 떠나 기차를 타고 황니허에 도착했던 것이다. 황니허에는 한족이 대부분이고 조선족은 조선족 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황니하의 산골마을에서 들은 탈북여성 이야기

 

거기서 나는 황니허에서 100리나 떨어진 한족마을로 가게 되었다. 근 한나절 빽빽이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200여가구가 살고 있는 ‘쓰창(4場)’이라는 한족마을이었다.

 

성이 한씨인 주인집에는 50대의 가장과 아내, 그리고 19살짜리의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한따웨이(大伟)이라고 불렀고, 초중을 중퇴하고 부모를 도와 산나물과 나무를 해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중국어를 잘 가르쳤다. 따웨이는 총명했고, “내가 중국어를 가르칠 테니 너는 나한테 조선어를 배워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走(가자)’ ‘说(말하다)’ ‘跟我來(날 따라와)’ 등 쉬운 중국말을 일하는 시간이나, 밥을 먹는 시간에도 동작까지 취하며 일일이 배워주었다.

 

밤에는 교과서를 낭독하며 기초부터 찬찬히 준비했다. 그때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에게 한국어를 원만히 가르쳐주지 못했다. 한족들끼리이니 한국어는 나와 같이 있을 때만 어쩌다 쓰곤 했지만, 늘지도 못했다.

 

뜻밖에도 이러한 산간오지에도 탈북여성이 살고 있었다. 탈북여성은 3년 전에 여기로 팔려왔고, 그간 여러 번 도망을 치다가 붙잡혀 곤죽이 되도록 매도 맞았다고 한다. 남자는 일하기 싫어하는 건달이었고, 술도 잘 마신다고 한다.

 

중국에서 장가가지 못한 사람들은 이처럼 건달꾼이거나, 장애인들이었다.  그들은 압록강이나, 두만강으로 넘어오는 탈북여성들을 한 명당 인민 폐 1만원 정도 주고 사와 아내로 맞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항상 걱정은 북한여자가 달아나는 것이다.

 

낮에는 문을 밖으로 잠그고, 담장도 높게 쳐져 넘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한번은 이 여성이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발을 타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마을은 시내에서 약 100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나가자고 해도 외통 철길 하나뿐이고, 도로도 없는 곳이었다.

 

남편이 술 마시고 밤새 행패를 부리자, 이 여성은 그날 밤으로 홑옷만 거치고 밖으로 나갔다. 겨울에 눈이 무릎을 치는 산발을 타고 넘던 이 여성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산속에서 헤매게 되었다. 이때 뒤를 쫓아온 남편의 형제들에게 붙잡힌 여성은 물건처럼 그 집으로 또 잡혀오게 되었다.

 

죽도록 맞고 터진 이 여성은 감옥 같은 집안에 갇혀 바깥출입도 불허되었다고 한다. 탈북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을 놓고 동정했지만, 나 역시 권리도 없는 놈이라 감히 그를 동정하지 못했다. 한번 얼굴이라도 보려고 했지만 내가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보지 못했다.

 

그곳에서 하는 일이란 산판에 올라가 벌목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산에는 목재가 많았다. 그러나 중국은 그 넓은 땅에 무진장한 목재를 가지고도 국가에서 채벌을 금지하고 있었다. 일감이 없던 노동자들은 그래도 허가를 받고 들어온 관리들이 시키는 대로 나무를 찍어 일본, 한국 등으로 팔았다.

 

목재는 직경이 1미터 50cm이상 되는 것도 있었다. 가지를 치고 다듬어 하루에 인민폐 20원씩 받았다. 그나마 일감이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한 달에 100~150원정도 벌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간 나는 그 집의 잡다한 일을 해주면서 중국어를 배우는데 목적을 두었다.

 

겨울이라 갈 곳도 없거니와 일감이 없는데 어느 집에서 삯을 쓰겠다고 하는데도 없었다. 따웨이가 친절하게 가르쳐준 덕에 나는 초보적인 말은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마을 공원이 왔다 가는 것이다.

 

집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어색했다. 한족 주인은 나에게 “오늘 술 한잔 하자”며 상점에 들려 닭과 술을 사왔다. 한 두잔 하자, 그는 “밍쩐(명진), 너는 이 집을 떠나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막을 알아보니 낮에 공안원이 왔다간 후 무슨 말이 오간 것이 분명했다.

 

주인은 “북조선 사람들이 연길에서 공안원을 죽이고 도망쳤다. 그래서 공안원이 너를 데리고 있지 말고 보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몇 달전 내가 용정을 떠나올 때 사건이 그때서야 여기까지 소문이 난 것이다. 그나마 공안원이 나를 붙잡아 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800원의 술값에 팔리다.

 

다시 일자리를 찾기 위해 거리를 헤맸다. 겨울이라 일자리가 줄어들고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 벌목장이라도 찾아가기 위해 여기저기 조선족을 찾아 다니며 부탁하기 시작했다. 황니하의 한 이발사 아주머니가 “여기서 한 50리 들어가면 웨후허(威虎河: 호랑이가 물을 먹고 간 곳)라는 곳에서 사람을 쓰겠다고 하더라”고 전해준다. 그는 다른 조선족에게 북조선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다닌다는 말을 하여 그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다.

 

다음날 나를 데리러 온 조선족은 “한족 집인데 월급은 한 달에 100원씩 주기로 하고 일하도록 하라”고 이르는 것이다. 그를 따라 간 곳은 한 임산 산골마을이었다. 그 마을에도 약 300세대의 살림집이 있었다. 이들 한족들은 산을 청부 받아 가꾸어 주는 대신 땔나무와 ‘검정귀버섯’을 키우는 재료인 나무목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마을에서도 약 100리 떨어진 한 외딴 산속이었다. 산속에는 귀틀집이 한 채 있었고, 개 한 마리와 30마리의 닭이 있었다. 개는 몹시 사나웠다. 중국인들은 나에게 그것을 먹이면서 자기들이 차를 가지고 오면 장작을 패두었다가 실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장작은 하루에 두 차 이상 패야 했다. 또 그들이 도착하면 산속에서 통나무를 잘라 날라와야 했고, 그들이 가면 나무를 패야 했다.

 

얼마 후 땔나무를 팔던 그들은 다시 검정귀버섯을 심을 나무를 찍기 시작했다. 검정귀버섯은 땅에 심어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균을 박아 비를 맞히면서 키우는 것이다.

하루에 소 바리로 다섯 개씩 날라야 했다. 경사가 급한 낭떠러지로 소 바리가 밀려 내려갈 때에는 무서웠다. 힘센 소가 나무 짐을 훌뿌려 놓으면 다시 그것을 쌓아서 날라야 한다.

 

나는 이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돈 100원이 너무 적었다. 그래서 중국인과 여러 번 다투었다. 나는 “지금 일하는 것으로 봐서 도저히 돈이 적다”고 들이댔다. 그러자 중국인이 뭐라고 하는지 시물시물 웃으면서 비웃는 것이다.

 

그때까지 무슨 소리인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북한에서 나왔다는 비웃음으로 들렸다. 나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 조선족을 불러 통역을 부탁했다. 조선족은 다 알 필요가 없다며 그들과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동안 중국어를 배운지라 귀동냥해 들으니, 조선족 라오리(老李)는 여름에 그 집에서 가져다 먹은 술값으로 돈 800원을 갚지 못해 나를 대신 소개해주고 변제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었다. 조선족이 내 일자리를 소개해준다고 하면서 나를 술값 800원으로 나를 팔아 먹은 것이다. 격분한 나는 당장 떠나겠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엄동설한에 과연 내가 가면 어디로 가겠는가,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해
 
좋지 않은 감정으로 대치하던 나는 다음날도 산판으로 올라갔다. 소바리를 끌고 목재를 끌어내리던 나는 날이 어둡기 시작했다. 한족들은 한번이라도 나를 더 부려먹기 위해 사정없이 산판으로 내몰았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소도 산판으로 올라갈 때는 느릿느릿 올라가다가도 산판을 내릴 때에는 몹시 빨랐다. 집으로 향하는 소의 발걸음도 엄청 빨랐다. 제집으로 빨리 가서 먹거리를 먹기 위해서다. 급경사를 따라 내려오던 소바리는 순간 뒤집히면서 소도 나뒹굴었다.

 

주인은 내가 내려오지 않자, 산판으로 올라왔다. 광경을 바라본 중국인은 뭐라고 욕을 해대는 것이다. 아마 소도 부릴 줄 모르는 촌놈이라고 욕을 해대는 것이다. 북조선놈이 소도 제대로 못 몬다는 비난이다.

 

그 말까지 들은 나는 격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老板, 我走了!(주인, 나가겠다)”라고 외치자, “走就走吧! 一分錢也不给”(갈 테면 가라. 한 푼도 안주겠다)고 배심 좋게 받아 친다.
 
그리고 그는 소를 끌고 산막 집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분노를 삭힐 만 한곳이 없었다. 그냥 숲속을 향해 “아- 아!”소리를 외쳤다. 어둠에 잠든 눈 덮인 산속에서 공허만 메아리만 내 가슴을 허빈다.

 

한참 고함을 치고 애궃은 줄담배를 피우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래 봐야 손해는 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나 돈을 벌어 이 지긋한 산판을 벗어나는 게 나에게 있어서 상책이었다.

 

음력 대보름 산속에서 홀로

 

음력설 명절이 되자 중국인들의 대보름 휴식이 이어졌다. 그들은 산속에 짐승과 나만 남기고 모두 명절 쇠러 내려갔다. 밤이 되면 맹수들의 울음소리 들리고 인기척 하나 없는 산속에서 살자니 몹시 외로웠고 고향생각이 났다.

 

울적한 기분에 조국땅을 바라보며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버지 생각도 났고, 어머니 생각, 동생 생각이 간절했다. 그때 꿈속에서 아버님이 자주 나타났다. 내가 집을 나간 다음 밥이나 제대로 먹고 사는지 걱정하는 꿈이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할 때면 일어나 책을 보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잡생각을 떨쳐야지 산속에서 미칠 것만 같았다. 소기에 결심을 품고 나왔으면, 악을 써서라도 살아서 성공해야 했다. 이 산속을 벗어나, 더욱이 산골에서 더 살지 말고 도시로, 동남아로, 한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말을 배워야 했다.

 

명절이 시작되기 전에 중국인 뭘 요구되는 가고 물었다. 나는 명절 음식보다도 소설책과 교과서들을 올려 보내라고 일렀다. 그리고 등잔을 밝히고 중국어 사전 한 권을 다 써보았다. 그 동안 한자를 많이 외웠다. 그리고 뜻도 모르고 중국방송을 부지런히 듣고 신문이나 책을 통째로 번역을 해보았다.

 

공부하다 지루하면 남한 방송을 들었다. KBS 사회교육방송이 아주 잘 들어온다. 이렇게 산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탈북자들의 남한입국현황, 중국체류현황을 속속 알게 되었다.

 

웬만한 자신감이 생겨 이제는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돈을 좀 더 모아야 했다. 중국도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워 한번 떠나자면 3천원은 휴대해야 노상에서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 탈북 2년 차인 내 수중에는 2천원나마 모아졌다. 바늘로 옷에 주머니를 만들어 달고 항상 이 돈을 몸에 차고 다녔다.

 

버섯 나무 하루에 3자동차씩 뚫어

 

초봄이 되자 또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겨울내 해놓은 목재를 마을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버섯 균을 심을 나무인 것이다. 전동 드릴로 통나무에 빼곡하게 구멍을 뚫고 여자들은 균을 톱밥에 섞어 구멍마다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나무를 넓은 공지에 내다 놓고 비를 맞히면 그 해부터 버섯이 자라기 시작한다.

 

근 한달 동안 나무 구멍을 뚫었다. 나를 포함해 중국인 3명은 하루에 3자동차씩 구멍을 뚫었다. 중국 한족들은 일을 무섭게 했다. 밥도 많이 먹고 일도 많이 하고

그들은 평소에 잘 먹지도 않지만, 일할 때는 밥도 많이 먹는다. 대체로 ‘만토우’라고 하는 김에 쪄낸 증기 빵에 미음을 잘 마신다. 더구나 값싼 노동력인 북조선 사람을 더 많이 부려먹자는 심사가 깔린 의도이기도 하다. 

 

일이 힘들어 나는 월급을 더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한 달에 중국 돈 200원(한화 2만 6천원)을 주겠다고 한다. 한달 동안 나무 구멍을 따 뚫은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새싹이 나기 시작해 나는 황니하로 나가 마음씨 좋은 조선족 노인의 집을 찾아 갔다. 그분은 고생한 나의 생활을 들어보고 나서 “명진아, 지금 떠나도 문제 없겠지만, 그래도 사내가 뜻을 이루려면 여비가 든든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가 2002년 3월 이었다. 한국에서는 월드컵을 한다고 방송에서 연속 보도한다. 나는 어디 가서 한 두 달 더 일하고 대담하게 한국에 건너가 월드컵을 보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어떻게 한국에 나가 월드컵을 볼 수 있겠는지 에 대해서는 욕망뿐이었다.

 

인삼 밭에서 인삼을 훔쳐먹다

 

두 번째로 일자리를 찾은 것은 인삼재배 농장이었다. 일전에 알고 있던 한족 친구의 도움으로 나는 인삼 밭 주인을 만나 의논했다. 중국인은 나에게 월급 400원(한화 5만5천원 가량)을 주겠다고 조건을 내놓았다. 월급 400원이면 일반 중국인들이 받는 돈과 같다.

 

나는 감사히 생각하고 흔쾌히 응했다. 그러나 그 뒤에 얼마만한 고생이 뒤따르는지는 미처 몰랐다. 인삼 밭은 한번 개간하여 심은 다음 5년 이상을 인삼재배를 하지 못한다. 땅의 약효가 떨어져 인삼이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인삼 밭에서는 인삼을 가꾸는 한편 다른 산을 개간해야 한다. 아름드리 나무를 찍고 그 근을 뽑아 불사르고, 돌멩이가 하나도 업이 그 흙을 채로 쳐야 한다. 이렇게 개간한 다음 규격 포전으로 만들어야 한다. 중국인들도 이 일만은 너무 험해 꺼리는 일이다.

 

일체 기계를 쓰지 못하고 도끼와 삽 곡괭이로만 뚜지는 이 일은 하루 휴식도 없이 진행됐다. 또 인삼 김매기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손으로만 인삼포기를 헤집으며 잡풀을 뽑아야 했다. 손은 온통 풀물이 들어 까맣게 변했고 얼굴은 불에 그슬려 까맣게 탔다.

 

먹는 물도 문제였다. 비록 벌판이라고 하지만, 우물이 말라 물이 나오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밭 가운데 우물을 파고 물을 길어 먹는다. 그런데 샘물이 아니고 비물에 고인 물을 먹는 것이다. 밭 가운데이니 거름물, 비료물, 온갖 흙탕물이 다 모인다.

 

물은 항상 혼탁해 있었고, 그래서 물을 끓여 먹었다. 물을 끓이면 흙은 가라앉고 좀 맑은 물이 나오는데, 그걸 마시면 속이 찜찜했다. 어떤 때는 구역질이 올라올 때가 있다. 습관된 중국인들은 잘 마신다. 그러나 나는 이 생활 적응이 중국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게다가 썩은 물을 먹고 일하자니 위장염과, 대장염이 발생해 하루 종일 뒤를 보아야 했다.

 

그러면 혹여 인삼이 몸에 좋다는데 이걸 먹고서라도 병을 떼야겠다고 하루에 인삼 한 뿌리씩 먹었다. 그러나 인삼 맛이 씁쓸한 게 그것도 시작해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서울 가서 월드컵 보겠다는 꿈 깨

 

드디어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주인에게 가겠으니, 돈을 계산해 달라고 했다. 그는 일년 동안 일하지 않으면 돈을 줄 수 없다고 한다. 나를 믿고 다른 사람을 구하지 않았으니, 자기 집의 일을 망친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일이 힘들어 사람들이 도중에 포기하기 때문에 돈을 절대로 월급 식으로 주지 않는다. 

 

연말에 가서 한꺼번에 총화를 짓는 것이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월드컵을 보지도 못하고 한달 동안 산에서 썩을 것을 생각하니 어처구니 없었다. 전기도 없고, TV도 없는 산전 막에서 나는 반도체 라디오를 켜놓고 귀로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월드컵 4강까지 오른 대한민국은 나에게는 자랑이었고, 유일한 희망이었다. 한국인의 위상을 세계에 당당히 떨치고 있는 한국의 모습은 중국에 사는 탈북자들에게도 우상의 존재다. 중국인들은 북조선이라고 하면 가난하고 못사는 ‘거지국가’라고 놀리고 남조선이라고 하면 손가락을 내 흔든다. 삼성 핸드폰이나 현대 자동차가 가지는 브랜드의 파워는 강하다.

 

여기서 나는 온 여름, 가을까지 인삼농사를 마치고 인삼 밭의 월동준비를 다 끝내고야 산을 내려왔다. 이렇게 여름내 어렵게 모은 돈은 3천원(한화40만원)가량 되었다.

 

이미 내가 가지고 있던 3천원까지 합하니, 거의 6천원이 되었다. 근 3년 동안 6천원. 북한에 있었으면 꿈도 못 꾸는 거금이었다. 중국은 먹고 사는 걱정은 별로 없는데, 돈 벌기가 엄청 힘들다. 나 같은 탈북자가 열심히 일해봤대야 3년 동안에 몇 천 원 쥐기 어렵다.

 

그것도 불법체류자들이니 제대로 계산해주지 않는다. 이제는 뜻을 이루게 되었구나 하는 안도감에 나는 천진으로 떠났다.

 

그러나 한국으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천진에 있는 한국학교나, 영사관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방송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중국공안에 붙잡히기만 하면 북송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일단 천진에 몸을 붙이고 차후에 진로를 결심하기로 하고 묵을 만한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한국 행을 알선해주겠다고 하던 브로커에게 3년 동안 피와 땀이 어린 6천원을 송두리째 사기 당하기까지는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은 천진난만한 이방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