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며 자유를 찾기까지
눈물 속에 다시 불려지는 80년 전 ‘압록강의 노래’
일천구백 십구 년 삼월 일 일은
이 내 몸이 압록강을 건넌 날일세
연(년)년이 이날은 돌아오리니
내 목적을 이루고서야 돌아가리라
이 노래구절은 내가 북한을 탈출할 때 부른 노래다. 그때는 내가 탈북한 연도와 날짜를 바꾸어 불렀다. 중국에서 나라 잃은 설음이 북받칠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사나이의 가슴을 허빈다. 허탈과 망각을 툭툭 발로 걷어차며 두만강을 건너던 6년 전 그날의 감회가 어제인 듯 삼삼하다.
이 노래는 1919년 3월 1일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제 고향을 등지고 망국의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불렀던 노래이다.
근 80년이 지난 개명천지에 다시 이 노래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있다. 가사를 더듬자니, 눈물이 앞을 가리웠다. 일제의 압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넜던 사람들과 내가 살길을 찾아 떠난다는 처지는 같다. 그때는 일제의 군화발소리가 삼천리 강토를 어지럽혔다면, 지금은 북한땅에서 같은 동족끼리 서로 물고 뜯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일제는 중국으로 가는 조선사람들을 막지 않았다. 가겠다는 사람을 굳이 막지 않았을 뿐 더러, 살고 있는 사람을 잡아다 감옥에 처넣지도 않았다. 그러나 김정일정권은 일제와 다르다. 우리가 고등중학교 때 김일성이 아버지 김형직이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복의 천리길’을 걸었다고 배웠다.
그때 김일성이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며 압록강을 건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지도자로 있는 나라의 백성들이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며 탈출하는 것이다. 압록강을 건널 때 김일성은 버젓이 건너면서도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들은 국경경비대의 삼엄한 경비를 피해 목숨을 내걸고 탈출하고 있다. 이래 놓으니, 일제보다 김정일이 더 무서운 독재를 펴고 있다는 반론이 서는 것이다. 김일성의 아버지도 일제경찰의 탄압을 피해 중국에서 살았다.
최소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일이라면 한번쯤은 백성의 입장에서 자신이 인민적인 정치를 펴는 가고 돌이켜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후대에 나쁜 사람으로 점 찍힐지 각오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지금 내 심정은 고향을 떠나 도망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을 때의 아슬아슬함을 통절히 느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북한에서는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고, 귀가 있어도 세상 밖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네다리 성성해도 먹고 살수 없는 곳이 북한이다. 북한에서 일생 동안 돈을 벌어 사람답게 살수 없다. 그야말로 어항 속에 갇힌 고기처럼 국가에서 주면 먹고, 안주면 굶어 죽어야 하는 곳이다. 내가 남아 있었대야, 어머니께 효를 하지 못하고, 쌀밥 한 그릇 제대로 아버지 묘에 드릴 수 없는 신세인데 무슨 미련으로 그 땅에 남아있어야 하는가,
‘아버지 미안해요, 성공하고 돌아올게요’
2000년 6월 초 나는 고향 평양을 떠난 지 열흘 만에 함경북도 회령시에 도착했다. 낮에 오산덕에 올라 두만강의 좁은 곳을 찾아 탈출경로를 물색했다. 밤 11시경 무려 두 시간 동안 배밀이로 국경경비초소구역을 통과한 나는 두만강 가에 도달했다. 어디에 지뢰가 묻혀있지 않을까, 혹 길을 잘못 들어 국경경비대의 잠복초소로 곧장 찾아 들어가지 않는지, 가슴 졸이는 순간이었다.
두만강 가에 다 달은 내 마음은 착잡해 났다. 한발자국만 내디디면 나는 ‘반역자’가 된다. 돌아서자니, 지금까지 결심 품고 사선을 헤쳐온 길인데, 돌아설 용기도 나지 않았다.
내가 과연 이 길을 가야 하나, 누가 오라고 해서 가는 땅도 아니고, 반겨줄 사람도 있는 것도 아니다. 초행길에 단지 자유 때문에, 강을 건너면 밥은 먹고 살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나선 길이다.
물소리 좔좔 흐르는 강변에 앉아 고향을 향해 돌아섰다. “아버지, 어머니 미안해요. 그리고 고향아, 네가 싫어 가는 게 아니다. 내 꼭 성공하고 돌아오겠다.” 이렇게 기도한 나는 차디찬 두만강 물에 ‘첨벙’ 몸을 던졌다.
때는 2000년 6월이었다. 북쪽의 밤 날씨는 쌀쌀했고, 빠른 급류는 나를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어푸-’ 물을 한 모금 들이킨 나는 상대편 기슭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두만강은 해발고가 높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물살이 빠르다. 가만히 서있어도 물살에 휩쓸려 넘어뜨린다. 한참 떠내려가다 발을 짚어보니, 뜻밖에도 무릎까지 물이 차지 않았다.
중국 땅을 밟으니, 미묘한 감정이 흘렀다. 드디어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외국 땅을 밟았구나 하는 안도감에서였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붙잡히면 안되겠기에 나는 무작정 산으로 향했다. 둔덕에 올라서니 동녘에서는 푸름 푸름 날이 새기 시작한다.
북한의 땅과 달리 중국 땅에는 돌이 거의 없었다. 내가 제일 먼저 눈 여겨 살핀 것이 중국 농장 밭의 옥수수 그루터기였다. 북한에 있을 때 중국은 정보당 옥수수 10t을 수확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밭에 풀이 한대 없다고 익히 들어온 터여서 도대체 어떻게 농사를 짓길래 소출이 많이 나는지 제일 알고 싶던 문제였다.
과연 옥수수 그루터기는 한줌에 쥐지 못할 만큼 굵었다. 중국은 땅을 농민들에게 50년 계약으로 임대해주어 먹는 걱정은 없었다. 농사를 지어 자기가 먹을 만큼 남기고 팔아 수익을 올리느라 농사를 잘 짓는 것이다.
나는 될수록 민가를 피해 산으로 올랐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방향을 북쪽으로 잡았다. 가랑잎이 무릎을 치는 울창한 산림 속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길을 잃을 가봐 태양을 등지고, 산등성이 길이 없어지면 제일 높은 나무꼭대기 위에 올라 방향을 잡곤 했다.
이렇게 밤이 되었다. 나는 가랑잎을 모아 깔고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잤다. 다행히 회령을 떠날 때 준비한 빵이 있어 첫날밤은 무사히 지냈다. 낮에 태양빛에 그나마 따뜻했지만, 밤이면 북쪽의 쌀쌀한 냉기는 이국의 매정만큼이나 차가웠다.
처음 만난 조선족 ‘당신 북조선에서 오는가?’
날이 밝으면 또 산발을 타고 걸었다. 이렇게 하루를 걸어 가는데, 앞에 숯구이막이 나타났다. 처음 보는 중국집이라 두렵기도 했다. 숯구이막을 에 돌아 도랑을 건너는데 앞에서 중국인 3명과 조우했다.
20대 남자 두 명과 30대 남자 한 명이었다. 숯구이꾼들 같지 않게 캐즈얼한 차림의 세 명은 나를 향해 뭐라고 중국말로 수군거리며 다가왔다. 나의 아래위를 훓어보며 그 중 한족 한 명이 “니 베이차오센 라이마?(북조선에서 오는가)”라고 묻는다. 말을 몰랐던 나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 수 밖에 없었다.
신기한 듯 그들은 저들끼리 히죽거리며 뭔가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나는 그들에게서 밥도 얻어 먹고, 도움을 받을 심산으로 “I’m from north Korea”(난 조선에서 온다”고 말했다. 그들은 영어를 몰랐다.
이때 30대의 중년이 나서며 “자네 조선에서 오는가?”라고 묻는다. 뜻밖에 조선말을 들은 나는 그렇다며 산에서 길을 잃고 배고프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했다. 그는 자기들이 묵는 초막으로 나를 안내했다.
초막에는 국수와 오이, 라면, 빼주(백주)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들은 국수를 끓여주면서 이 지방은 변방순찰대들이 수시로 나타나 조선사람들을 붙잡아 가니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안쪽으로 들어가겠는가,
나는 조선족에게 말을 배울 동안 일할 수 있는 곳을 알선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도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국수를 배불리 먹여주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들은 북한에서 넘어오는 여자들을 접수하기 위해 국경에 나온 사람들이었다. 한밤중에 약속된 장소까지 나가 한 두 시간씩 전화로 연락을 하곤 했다. 자기네 일에 방해된다고 내가 있는 것을 반가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다음날 일찍 산발을 타고 또 북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6월이라 산골짜기 마다 고사리가 엄청 많았다. 고사리를 뜯는 중국인들도 많았다. 나는 거기서 한 중국조선족을 만나 고사리를 뜯어주고 일자리를 얻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도 나를 가엽게 생각해 숯구이막으로 나를 안내했다. 숯구이막에는 인부 약 20여명이 일하고 있었다. 거의 한족이고 두 사람만 조선족이었다. 조선족은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내일 노반(老板. 사장)이 오면 토론해보겠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날 출근한 노반이 나를 훓어보더니, 나를 채용하겠다던 사람을 욕을 하는 것이다. 알지도 모르는 사람을 받아 놓고, 경찰이 닥치면 영업정지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돈 중국 돈 10원을 쥐어주며 도로에 나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품은 3대 목표. 양 몰이꾼으로 1년간
숯구이막에서 쫓겨난 내가 정처 없이 산골마을로 들어가기 시작하다 떨어진 곳이 길림성 용정시 지신진(吉林省 龍井市 智新鎭)이라는 곳이다
마침 밭에서 일하는 농부를 만났다. 그 역시 나를 흘겨보더니 “중국사람도 돈 벌러 한국에 나가는데, 오죽하면 북조선 사람들이 들어오겠냐”며 혀를 끌끌 찬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일하자면 인가에 있지 말고 산에 들어가 막을 치고 살라는 것이다.
그는 정 일할 생각이 있으면 양몰이꾼을 필요로 하는 집이 있으니, 알선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당장 거처할 곳이 없게 된 나는 언똥이라고 가릴 형편이 못되었다.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양 목장에는 양 300마리와 늙은 양몰이꾼이 한 명 있었다. 나는 일단 중국말도 좀 배울 심산으로 쾌히 일년 동안 일하겠다는 계약을 했다. 공자(삯)은 일년 후에 중국 돈 천원(한화 13만원)을 받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 없는 값이다. 주인은 양 한 마리에 5백 원씩 하는 중국에서 그나마도 다행으로 생각하라는 눈치였다. 풀을 양은 하루 종일 먹어도 배가 고파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양과 함께 밖에 나가야 한다. 털 깎는 시즌이면 똥칠할 가봐 3일에 한번씩 양우리 청소를 해야 한다.
겨울이면 무릎을 치는 눈을 헤치며 양을 끌고 들로 나가야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면 볼과 발은 꽁꽁 얼어 든다. 더욱이 양을 잃어 버리면 품삯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혹시 저녁에 들어와 양을 점검하다 한 마리라도 없어지면 밤새 목이 터져라 양 소리를 내며 온 산 판을 다 뒤져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양들도 먹는 짐승이어서 매일 나가야 한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집에 움츠리고 나오지 않았지만, 동북의 영하 40도 속에도 양을 몰고 다녔다.
한번은 일한 지 두 달 만에 요녕성 성도 선양까지 나갔던 적이 있다. 말도 모르고 손짓몸짓 다 해가며 한자를 통해 겨우 행선지를 정하던 나는 한국사람을 만나고야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 첫째, 말을 배워야 한다. ▲ 둘째, 돈을 벌어야 한다. ▲ 셋째가 신분증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중국어 배우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주인에게 공부를 할 수 있게 소학교와 중학교 교과서, 사전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주인은 산판에서 책을 보면 양을 잃어버린다고 썩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돈이나 벌 생각을 해야지, 공부는 해서 뭐하냐고 빈정댔다.
동네 여기저기 다니며 소학교, 중학교 교재를 구입한 나는 중국어의 병음과 글자를 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맹목적으로 성조도 가리지 않고 외웠고, 글의 의미가 이해되면서 공부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함흥출신 박철만을 만나다.
2000년 12월 내 생일날이었다. 처음으로 이국 땅에서 맞는 생일은 참 쓸쓸해 났다. 앞집 농사일을 해주고 있던 26살의 함흥이 고향인 박철만이 중국 빼주 한 병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평성이과대학 재학 중에 살림이 어려워 학업을 단념하고 중국에 온 그는 명석하고 아는 것도 많았고 포부도 컸다. 동남아시아, 몽골로 탈출하는 탈북자들의 소식을 방송을 통해 들어왔던 그는 돈을 벌어 동남아시아로 나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는 “형, 오늘은 원두막에서 술 한잔 먹지만, 훗날에는 호텔에서 쇠기요”라고 나를 위로해주었다. 이국 땅에서 조국의 친구는 한결 의지된다. 중국조선족들은 탈북자들이 서로 모이는 것을 싫어했다. 서로 짜고 사고를 칠 가봐 몹시 경계했다. 특히 우리주인 같은 경우에는 양을 훔쳐갈 가봐 제일 두려 했다.
철만이는 3년 동안 일했지만, 주인이 돈을 주지 않아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7정보에 달하는 옥수수 밭을 다루면서 한 해에 인민폐 1500원(한화 20만원)을 받기로 했다고 한다. 3년을 꼬박 일해주었지만,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고약한 주인은 철만을 더 일 시키기 위해 “한해만 더 일하면 집도 사주고 땅도 떼어주겠다”고 유혹했다. 한국에 나가겠다고 하면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조선에 나가 부모님을 구해야겠으니, 돈을 좀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주인이 들판으로 찾아와 “경찰이 이 지대를 수색하고 있으니 피하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양무리를 주인에게 인계하고 나는 산속으로 급히 숨어버렸다. 밤에는 주인집 외양간의 다락에 올라가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밤 12시가 지나자, 철만이가 묵었던 집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전지불을 번득이며 돌아 친다. 결국 나는 거기서 더 있지 못하고 다른 마을로 차출되었다. 즉 주인의 친척집에 가서 일해주기로 하고 옮겨졌다.
경찰이 들이닥친 이유인즉 철만이가 주인과 품삯다툼을 벌이다가 때리고 도주한 것이다. 돈을 달라고 사정하던 철만이는 술을 마시고, “조선에 있으면, 당신 같은 사람은 열 번도 더 족쳤다. 사람이 약속을 왜 그렇게 안 지키는가?”고 격분해 주인을 때려눕히고 도주했다고 한다.
철만이가 달아난 후 동네 주민들은 그 주인을 욕했다. 일했으면 돈을 줘야지 실속 없는 사람이라고 주인을 욕했다. 주인은 자기가 맞은 것을 핑계로 철만이를 쫓아내기 위해 경찰을 부른 것이다. 나는 그 후 철만이를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연길(延吉)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후 감감 무소식이다. 내가 품삯을 받으면 함께 동남아로 떠나자고 약속했던 그를 한국에 들어와서도 만나지 못했다.
잣나무와 버섯 뜯어 돈을 벌어
중국도 돈 벌기가 만만치 않았다. 지신에는 잣나무와 ‘솔 버섯’이라고 하는 버섯이 많았다. 솔 버섯은 맛도 좋고 값도 괜찮았다. 9월부터 본격적으로 뜯기 시작하는데, 말린 버섯 1근에 10원에서 좋은 것은 20원까지 했다.
양우리는 산 위에 있었기 때문에 버섯이 많이 나는 버섯이 나는 곳을 잘 알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한 망태기씩 따오곤 했다. 그걸 말리면 1~2근 정도는 나왔다. 말린 버섯을 차곡차곡 장만하는 기쁨이 남달리 컸다. 그걸 팔면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그만큼 빠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팔아서 돈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함께 양을 몰던 중국인 홀아비는 버섯을 뜯지 않고 낮잠만 자다가도 주인에게 내 일거일동을 일러 바치는 것이었다. 한번은 주인이 버섯을 가져오라고 한다. 버섯은 양모는 일 외에 따로 뜯은 것인데 왜 그걸 주인이 가져오라고 하지?
이유인즉 자기의 밥을 먹고 뜯은 것이어서 판매권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다. 분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참자. 남의 나라에 와서 사고를 치지 말자’고 참았다. 그 후 근 50근 되게 말리었던 버섯은 후 날 옷 한 벌이 되어 돌아왔다. 버섯 돈을 품삯과 함께 계산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 산에는 잣나무가 유달리 많았다. 잣도 1근에 5원씩 하기 때문에 따서 팔면 괜찮게 벌 수 있었다. 점심에 자지도 않고 나무에 올라 송진을 가득 묻히며 잣을 따내 땅에 파묻곤 했다. 그러나 청서란 놈이 내가 감춘 잣무지를 파헤치고 부지런히 자기 굴로 날라갔다. 그 습격 때문에 드러난 잣무지를 발견한 사람들이 훔쳐가 잣으로 돈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1년 품삯으로 1,200원을 손에 쥐고
그간 나는 남한으로 가기 위한 구체적인 정보수집에 매달렸다. 우선 반도체 라디오를 구입했다. 18원 하는 단파라디오를 사가지고 산에 올라가 밤새 들었다. 남한 KBS방송과 자유아시아 방송이 나의 자유를 찾는데 일등 공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동북지방에는 밤이면 라디오전파가 잘 들어왔다. 북한에 있으면 마음 졸이며 듣던 방송을 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으니 좋았다. 중국내 탈북자 상황과 그들의 동남아행, 그리고 외교공관에 진입하는 소식이 거의 매일과 같이 방송됐다. 특히 2001년 7월 베이징주재 유엔난민 고등판무관실에 뛰어든 장길수 가족에 대한 소식은 나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나에게도 길이 있다. 희망이 있다”는 신심에 엉덩이가 들썩거리고 희망이 샘솟았다. 빨리 가고 싶었다. 선양영사관에 뛰어 들어가 망명을 요구하고 싶었다.
이렇게 1년을 일한 나는 주인에게 품삯을 계산해달라고 요구했다. 주인은 1년 품삯과 버섯 값이라며 1,200원을 주었다. 일 년 동안 300마리의 양을 비가 오나, 눈이오나 관리해준 나는 삯이 너무 적다고 사정했다.
주인은 “원래 계약은 1천원인데 상금으로 200원을 더 준다”며 더 줄 것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다른 탈북자는 3년 동안 일하고도 돈을 못 받았지만, 나는 그래도 돈 천원을 쥐게 되었다. 그 돈이면 연변에서 기차를 타고 동남아까지 갈 수 있는 돈은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언어가 문제였다.
증명서가 없는 내가 기차나 버스를 탔다가 단속이라도 당하면 어쩔 수 없이 붙들리고 만다. 나는 두 번째 목표인 말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붙잡히지 않고 내가 소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우선 내륙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연변에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던 끝에 한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조선족이 있는 한족고장에 들어가면 말은 빨리 배울 것 같았다.
2001년 9월 행장을 갖추고 연길시로 빠져 나갔다. 용정과 연길역전에는 중국공안들이 쭉 깔려 있었다. 며칠 전 용정에서 탈북자와 경찰간 격투 끝에 살인사건이 났다며 일대 단속에 나선 것이다.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가 자기를 단속하는 경찰관 두 명과 격투 끝에 칼로 찌르고 도주했다는 것이다.
주인은 “지금 공안이 탈북자들을 매일 한자동차씩 붙잡아 북송하고 있다. 너도 살려면 빨리 연변지구를 벗어나라”고 일렀다. 대충 짐을 꾸려가지고 택시를 타고 안도현, 돈화시 쪽으로 향했다. 검문소 곳곳에서는 경찰이 버스를 세우고 사람들의 신분증을 검사하고 있었다.
나는 2001년 9월 돈화시 황니하(敦化市 黃泥河)라는 곳에 갔다. 황니하는 항일빨치산 회상기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황니하 사득판에서’라든가, 일본 군경들과 황니하 골짜기에서 싸웠다는 내용이었다.
황니하 거리는 연길거리와 달리 한족음식 특유의 샹차이(香菜)냄새가 자욱하고, 길옆에 음식이 즐비했다. 처음에는 중국사람이 두려웠으나, 중국에서 한 일년 살고 보니, 별로 두렵지 않았다. 나는 조선족의 도움으로 여관을 소개받았고, 그곳에서 중국인을 만나게 되었다.
거기서 두 번째 목표인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중국조선족들과 지내면서 중국어 간자체는 익혔지만, 발음은 엉망이었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한족들과 함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돈화쪽으로 택했고, 한족집에서 일년간 일하게 되었다.
차명진(가명, 2003년 입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