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의 노래를 부르며(종편)
황니허에서 만났던 잊지 못할 은인
천진으로 떠나기 앞서 나는 뚠화시(敦化市) 황니허(黃泥河)진에 있는 조선족 윤상준이라고 부르는 노인의 집을 찾았다. 금산촌이라고 하는 조선족마을의 촌장을 맡고 있는 그분은 참 인정이 많았다. 58년 북한을 다녀왔다는 그 사람은 탈북자들에 대한 각별한 동정심과 인정이 풍부했다.
참고로 그분의 사람됨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쓰창(4場: 목재소)에서 한족의 집을 해주고 품삯을 받다가 공안의 암시를 받아 그곳을 떠난 후 엄동설한에 갈 곳이 없어 이집, 저집 다니며 구걸하는 나를 가엾게 생각해 며칠 동안 집에서 쉬게 해주었다.
중국어 소통이 되지 않아 한족들과 논쟁을 할 때도 그는 철저히 탈북자의 입장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주곤 했다. 그는 내가 인삼 밭에서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뛰쳐나왔을 때에도 “길 떠나는 사내주머니에는 돈이 좀 있어야 한다”며 나를 다시 등 떠밀어준 사람이었다. 중국 빵과 멀건 죽이 맞지 않아 못 먹겠다고 한 내 말을 기억했다가 작업장까지 고추장 단지를 들고 찾아왔던 귀인이었다.
열악한 타국생활에 그만큼 좋은 사람을 만난 것 만도 나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인삼 밭까지 찾아와 작업환경을 일일이 조사하고 한족 노반(사장)에게 노동조건 및 임금문제까지 전면에서 나를 옹호해준 사람이었다.
윤씨의 사람됨을 읽게 하는 이러한 일화가 있다. 그가 베이징(北京)-투먼(圖們)행 열차를 타고 여행한적이 있었다. 그가 탄 열차 칸에 3명의 중국공안들이 탈북여성 6명을 호송하고 있었다. 윤씨는 조용히 한 탈북여성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무슨 일로 어디로 가는 거요?”순간 조선말이 나오자, 한 여성이 발에 매달리며 “아저씨, 우린 조선에서 배가 고파 중국에 온 사람들이요, 길림에서 일하다가 체포됐어요. 저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통역 좀 해주세요”라고 간청했다.
윤씨는 “이 여성들을 어딜 데리고 가는가?”고 묻자, 공안원은 “도문으로 간다. 이들은 불법도강자들이기 때문에 조선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윤 노인은 “당신들은 이 여자들이 거기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고 재차 되물었다. 그러자 공안원들은 “모른다.”고 짧게 내뱉은 뒤 윤씨와 대화한 탈북여성의 입을 손으로 윽박지르며 말하지 말라고 욕을 해댔다.
동족이 냉대받는 것을 목격한 윤씨는 공안원에게 “당신들은 인정도 없는 사람들이다. 살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을 사지판으로 보내는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다”고 쏘아 붙였다. 그의 가슴에도 조선사람이라는 동질감과 타국 공권력에 유린당하는 모습에 격분이 치밀어 올랐던 모양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연신 혀를 차며 “문화대혁명 때도 중국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조선에 많이 나갔다. 그때 조선에서는 직업도 주고 배급도 주었는데, 이 대놈(한족을 욕하는 말)들은 인정도 없는 미욱한 놈들이야”고 비난했다. 그는 또한 남북관계, 북중관계 등 상당히 개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이야기 상대가 되어 나의 진로문제에 대해 많은 고견을 접했다. 이렇듯 그 사람은 인정이 풍부한 사람을 만난 덕분에 중국에 있는 동안 외로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세가지 목적 중 한가지를 못 이뤄
내가 인삼밭에서 일을 끝내고 하산한 것은 2002년 12월이었다. 3년 동안 인민폐 6천원을 손에 쥔 나는 고향을 떠난 2년간을 총화 했다. 초기에 세웠던 세가지 목적 중 나는 돈을 벌고, 말을 배우자던 두 가지는 이뤘다. 다만 중국신분증을 만들자고 세웠던 계획만은 한국에 나올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
황니허에 있을 때 장샤오(長哮)라는 한족친구를 사귄 적이 있다. 그의 처남은 공안원이었다. 나는 그의 힘을 빌어 중국신분증을 만들기로 했다. 처음에는 문제없다던 그도 처남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난색을 표하며 신분증은 안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황니허를 떠나는 자리에서 “신분증이 없어도 나는 천진으로 나가겠다. 거기서 한국사람들을 만나 한국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평소 나의 뜻을 기꺼이 찬성해주던 윤씨였기에 나를 바래주기 위해 역전까지 나왔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국에 입국한지 1년이 지나 나는 중국에 나가 그를 만났다. 한국행에 성공한 나를 부여잡고 그는 과연 그럴 줄 알았다며 성공했다고 연신 추어올리는 것이었다.
황니허를 떠난 나는 천진역에 도착했다. 새벽에 내린 천진역은 너무도 넓어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우선 한국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중국인들에게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주거동네를 물었다. 중국택시들은 한국인들의 집중거주지인 남개대학 근처로 안내했다. 이곳에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과 한글간판을 내건 한국식당들이 많았다.
나는 이집 저집을 돌면서 사장의 얼굴을 보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우선 조선족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으면서 여기 일할만한 곳이 없는 가고 물었다. 그 사장은 “여기는 한국사람들이 많기는 한데, 겨울에 어디 가서 일자리를 구하겠는가”며 혀를 찬다.
밤이 다가오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의 대도시들에는 범죄폭력방지 기간이어서 사방에서 공안 110(긴급사고출동번호)차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잘못 들어갔다가 잡히면 재미없었다.
한국인 사장을 만나다
나는 조선족 식당주인이 쥐어주는 명함을 받아 들고 민박집으로 곧바로 찾아갔다. 나는 “오늘 잠잘 곳이 없어 그러니 하루 저녁만 재워달라”고 사정했다.
신분증을 요구하던 한국인 민박집 사장은 신분증을 내놓지 못하고 말투가 서툰 나를 바라보며 “당신 어디서 오는가,”라고 대뜸 묻는다. 북한말투에 행상이 조선족도 아닌 탈북자라는 느낌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는 북한에서 나왔다.”고 털어놨다. 그 사장은 조용히 나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를 마주한 사장님은 무엇인가 타자를 치면서 나에게 문초하듯 하나하나 캐어묻는 다. 집은 어디며, 언제 북한을 탈출했으며, 천진에는 무슨 일로 왔으며, 향후 어떻게 할 타산인가고 물었다. 무엇인가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공안에 붙잡혀 취조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사장님, 제발 공안에 신고하지 마십시오”라고 애원했다. 사장님은 “앉으라, 왜 겁이 많은가”며 껄껄 웃는다.
그때 그 사장님이 두드리던 자판은 98년산 노트북이었다. 노트북을 처음 본 나는 매우 신기했다. 물론 최근 쏟아져 나오는 신형 노트북에 비하면 형편없이 무겁고, 낡은 형이었지만, 당시는 입을 딱 벌릴 만큼 신기한 물건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국이 저렇게 발전했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경력과 북한을 탈출하게 된 동기, 그리고 남한에 꼭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당장 남한에 어떻게 나가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날이 밝으면 천진 한국영사관 담장을 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장님은 허허 웃으며, “그러다 영사관 경비원들이 붙잡아 공안에 넘기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묻는다. 딱히 드릴 말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 못한 것은 아니지만, 남한방송에서 탈북자들이 외교공관에 뛰어든다는 소리만 들었던 터여서 막연하게 아무런 계획이 없어 세웠던 모험이다.
낯 모를 불청객이 뛰어들었을 때, 한국영사관측과 중국공안이 어떻게 대응하겠는지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사장님은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아침 토론하자며 식사를 시켰다.
민박집은 깔끔했고, 그때 처음으로 인간다운 방에서 네다리 펴고 잘 수 있었다. 오랜만에 쌀밥을 먹은 나는 푹신한 침대시트에서 한시름 털어버렸다. 중국에 나온 지 10년째인 사장님은 중국사업을 하느라고 바쁘게 살았다.
사장님은 한국에 가는 일은 차츰 생각하고 여기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도 외국에 나온 한국인으로서 불법 체류자인 나를 숨겨주다가 공안에 단속되는 날에는 벌금을 물고 워창쯔이(숨겨준 죄)로 추방될 수도 있었다.
나는 천진민박에 있는 기간 한국사람들과 적잖이 대상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입국한 후 내가 어렵지 않게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한국사람들에게서 많은 문물을 접했던 이유가 있다.
“컴퓨터를 배워라”한국행 실마리를 트다
사장님은 우선 “네가 중국에서 살든 한국에 나가든 컴퓨터는 배워야 한다. 지금부터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라”고 지시했다. 나는 눈만 뜨면 컴퓨터에 앉아 자판 두드리기를 했다. 200개 타자를 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사장님은 나에게 인터넷 접속방법을 알려주며 탈북자관련 사이트들을 소개해주었다. 당시 보았던 탈북자 관련 사이트는 ‘탈북자동지회’ ‘NK조선’ ‘백두한라회’등이다. 탈북자관련 사이트에는 북한을 탈출하며 겪었던 가지가지 수기들과, 김정일, 김일성 등을 욕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북한을 떠나올 때 김부자에 대한 반감은 있었으나, 너무도 강도 높은 그들의 욕에 처음에는 섬뜩했다. 사이트의 글을 읽어 내려가니 북한에서 몰랐던 사실들이 많았다. 그 글을 보면서 나도 빨리 한국에 입국해 목소리를 합치고 싶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메일사용법을 알려주었고, 빨리 컴퓨터를 배워 현대인이 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주었다.
그러나 나에게 이러한 행복한 나날을 오래 제공하지 않았다. 어느날, 민박집에 중국공안들이 닥쳤다. 민박경영과 관련해 경계해오던 중국공안이 불법체류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의에 습격한 것이다. 중국에는 대도시로 밀려드는 농촌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짠즈쩡(도시임시 거주증)’을 발급하고 있다. 비록 같은 중국공민이라도 농민들이 짠즈쩡이 없이 도시에 진출하면 붙잡아 귀향시키고 있다.
중국정부의 도시노동자 일자리 보호와 중국농촌의 리농(離農)현상을 막기 위한 일단의 조치인 것이다.
짠즈쩡이 없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용자도 단속되면 일련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나는 공안이 1번 엘리베이터로 올라온다는 기별을 받고 내의바람에 비상현관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겨울 밤 내의바람에 거리에 빠져 나온 나는 밤이 깊어서야 다시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 도시 생활도 결국 나에게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국으로 가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그 사장님과 헤어져야 했다.
베트남 국경을 향해 정처 없이 길 떠나
사장님의 “어디로 가겠는가”는 물음에 딱히 향방이 없던 나는 “베트남 국경을 넘겠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몇 가지 주의점을 열거하며, 결심이 섰으면 떠나라고 등 떠밀어주었다.
텐진을 떠나 베이징에서 나는 베이징-광둥행 열차를 타고 베트남 국경도시인 난닝(南寧)까지 내려갔다. 난닝에 도착한 나는 베트남 국경을 넘기 앞서 한국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한국인이 많은 중국의 대도시 치고 난닝에는 거의 없었다.
나는 난닝 시내를 돌며 한국어 간판으로 된 식당이나, 호텔을 찾았다. 중국인들도 광동어를 쓰고 있어 편안히 대화할 수 가 없었다. 다행히 젊은 세대들은 보통화를 구사할 수 있어 그들을 내세웠다. 같은 중국인이라도 통역을 대동해야 대화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를 통해 광서성 정부 외사과를 찾아갔다. 거기서 한국무역법인대표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요행 만남이 성사된 그 대표는 많은 탈북자들이 난닝을 경유해 베트남으로 탈출했다며, 그 중에는 붙잡혀 북송된 탈북자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거라며, 만약 한국에 가더라도 자기를 만났다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자기명함을 밝히는 것도 꺼려했다. 공직자로서 정체 모를 탈북자와의 만났다고 하면 입지가 위태하다는 것이다. 그 대표는 엔볜에 가면 탈북자들을 도와주는 ‘두리하나선교회’를 비롯한 기독교 선교단체들이 있으니, 거기 가서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어떻게 헤쳐온 수만리 장정이라고 다시 돌아가라는 소리에 맥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3박4일을 묵고 다시 기차를 타고 텐진으로 향했다.
‘10년 감소한’ 공안의 신분증 검열
천진에 다시 도착한 나는 한 한국회사에 다니면서 컴퓨터를 배우며 탈출할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탈북자 관련 사이트에 고향친구를 찾는다는 글을 올렸다. 뜻밖에도 남한에 먼저 입국한 한 탈북자가 나의 글을 보고 자기의 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은 답장을 해주었다. 드디어 나는 희망의 끈을 잡게 되었다.
그를 통해 두리하나 선교회 천기원전도사와 연락이 닿게 되었고, 6월 내몽고 자치주 국경도시인 만저우리(滿洲里)에 도착할 데 대한 지시를 받게 되었다.
만저우리로 가던 중 아슬아슬한 위기를 모면하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만저우리로 떠난다는 메일을 남기고 나는 텐진역에 나갔다. 기차를 타면 만저우리까지 약 30시간이면 들어갈 수 있었다. 가격도 300원으로 버스를 타는 것보다 훨씬 절약됐다. 나는 우선 기차를 타기로 하고 차표를 끊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중국에서는 사스가 돌기 시작했다. 승객들로 붐비는 역전 개찰구에는 중국위생부에서 동원된 사스방역대와 공안원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x-ray 검사대에 지켜 서있는 공안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사스방역대의 진찰을 거치고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한 공안원이 “서라, 신분증을 보자”고 소리쳤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큰 대사를 앞두고 재수없이 걸리다니……
나는 조바심을 안고 “신분증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야, 그럼 저쪽에서 조회해봐!”라고 소리치며 턱으로 컴퓨터로 신분을 확인하는 쪽으로 떠밀었다. 나는 컴퓨터앞에서 신분증 조회를 하고 있는 여자 경찰관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이제 그 여자 경찰관이 묻는 대로 나의 주소와 신분증 번호를 대면 진짜 중국인인지 아니면 탈북자인지 판가름 나게 된다.
이때 웬 젊은 사람이 나를 단속한 공안원을 우회하여 빠지려고 했다. 공안원이 그를 소리쳐 부르자, 여자 경찰관의 시선도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내가 빠지기에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기회였다. 나는 사람들이 많은 쪽으로 몇 걸음 옮기다가 쏜살같이 줄행랑을 놓았다. 뒤에서는 마치 공안이 덜미를 잡는 것 같이 한동안 오싹했다. 역전인파에 묻히고 보니, 공안원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만저우리에서 한달 입국비용 안주면 안 보내줘
다음은 버스로 움직이는 수 밖에 없었다. 버스는 기차보다 좀 안전했으나, 값이 비쌌다. 우선 선양(瀋陽)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다음은 하얼빈((哈爾濱)까지, 만저우리까지 이어달리기를 했다. 근 3일만에 만주리에 도착한 나는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도착했다는 전화를 했다. 그 친구에 의해 천기원 전도사와 연결되었고, 현지인들의 지시를 받으며 아지트에 머물게 되었다.
만저우리 사막을 지나 몽골에 들어서면 중국생활도 끝이 나게 된다. 나는 이제나 저제나 빨리 이 무시무시한 나라를 떠나 자유 대한민국으로 날라가 주기를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무엇이 잘 안 풀리는지, 현지총책은 기다리라며 행동을 미루기 시작했다. 후에 알고 보니 현지인들은 한국에서 돈을 보내오지 않아 우리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한 사람에 한해 인민폐 6천원씩 매겨놓고 있었다. 나도 중국에서 벌었던 6천원을 바치면 되겠지만, 내가 천진에 있을 때 여권을 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어 그 돈을 맡겼다가 다 잃고 말았다. 3년 세월 벌었던 그 피 같은 돈을 홀랑 다 잃고 말았던 것이다.
8명 우리 일행 중에는 한 푼도 몸에 지니지 않은 사람이 나를 포함해 3명이나 있었다. 처음 최소 입국비용이 있는 가고 묻는 현지인에게 나는 “한국에 나가면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한번만 도와주세요”라고 빌었다.
이럭저럭 한 달이 지난 어느날 최종적으로 한 장소에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모임장소에 이르니, 중국에서 볼 수 없었던 탈북자 8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북한을 떠난 지 3년 만에 만나는 동포들이어서 반가웠다.
우리는 현지인이 준비한 찦차에 모두 타고 사막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기후에 무연하게 펼쳐진 몽골 사막에는 풀도 나무도 한대도 없다. 다만 군데 군데짐승막사가 보였다.
만저우리에서 몽•중국경까지는 약 100km를 우회해 나가야 한다. 운전사는 차를 몰고 앞으로 질주하다가 세우고 “우리는 여기서 돌아가야 한다. 공안에 차 남버가 찍히면 나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남자 몇 명을 불러 방향을 가리키며 “이쪽을 따라 쭉 나가면 몽골 초소 철조망이 보인다. 그걸 넘어 몽골군 초소를 찾아 난민이라고 말하라”며 쌍안경과 물, 그리고 빵을 건넸다.
날이 어둡기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찦차 한대가 쏜살같이 질주해 오고 있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차를 만나면 갈 곳이 없었다. 그 차는 우리와 헤어졌던 그 차였다. 운전사는 뛰어내리며 “아무리 생각해도 몽골국경이 너무 먼 것 같다. 내가 잘 못 판단하면 당신들 운명이 끝장인데, 좀 더 나가자”며 차를 30리 가량 더 앞으로 전진시켰다.
사막의 하룻밤, 목숨 건 탈출
날이 어둑해지자, 우리는 30m전방에 남자 2명을 척후병으로 세우고, 중간에 여자 4명, 후방에 남자 2명을 세우고 앞으로 전진했다. 만약 앞에서 누구와 접촉하면 뒤에서는 신속히 대피하게 말이다. 날이 새기 전에 몽골 국경을 넘어야 했다.
달이 뜨기 시작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몽골방향은 서쪽이 된다. 그래서 동쪽에서 뜨는 달의 자기 그림자를 밟고 가면 곧 몽골국경에 도달하게 된다. 거의 새벽이 가까워 오는데, 도무지 철조망이 나타나지 않았다. 달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이치를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대로 그림자를 밟고 가면 우리는 다시 북쪽이나 동쪽으로 우회하게 된다. 우리 일행은 다시 모여 쌍안경의 나침반을 놓고 서쪽방향으로 행로를 바꾸었다.
아니라 다를까, 사막 한가운데 논두렁 같은 장애물이 나타나고 철조망이 나타났다. 우리는 환성을 질렀다. 그 철조망만 넘어서면 자유를 찾는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억눌려 자유를 억제 당하고 천대를 받으며 살았지만, 이것만 넘으면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철조망은 높이가 약 2.5m 가량 되었고 중간 틈새도 거의 없었다. 나와 한 친구는 양 옆에서 철조망을 한 발로 밟고 다른 손으로 치켜 올려 우선 여자들을 빼냈다. 그런 후에 마지막으로 철조망을 넘었다. 우리는 몰렸던 피곤을 가까스로 참으며, 몽골초소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몽골국경경비대 막사를 찾아 조사를 받고, 몽골 경비대 사령부, 거기서 울란바따르까지 긴 노정을 근 한달 동안 여행했다. 나는 그 기간 많은 것을 보았고 경험했다. 그때의 고생을 말로 어떻게 표현하랴, 양치기 1년, 인적 없는 산판에서 1년, 인삼 밭에서 1년, 천진에서 1년. 이렇게 북한을 떠난 지 4년 만에 나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자유를 찾았다. 울란바토르- 서울행 여객기가 이륙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때만도 온 천하를 얻은 것 같은 뿌듯함이 나를 감쌌다.
그때 상황을 하나하나 적었던 수기책은 몽골 국경경비대에게 회수당했다. 아쉬움이 남아 지금 그때 상황을 하나하나 더듬어 적었다.
이 글을 빌어 의지할 데 없이 헤매던 탈북자들 받아 자유를 준 대한민국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형제들을 지옥에서 구원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일꾼들께 감사 드리며 부디 더 많은 어린 양들을 구원해주기를 간절히 부탁 드리고 싶다.




참으로감격스럽습니다 나도모르게 이글을읽고 눈물이나왔읍니다 참으로고생많이하셨읍니다 우리동포들은 중국에서 푸대접받는데 우리대한민국은 조선족들을 아주많이채용한답니다 특히건설쪽에서 나도건설쪽에근무를하고있읍니다 그러나 긎들은정이안갑니다 돌아설때는 아주 냉냉한 그런점을많이느끼고있읍니다 그래도같은민족이좋은것입니다 앞으로대한민국에서 못다이룬꿈 이루세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