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도살장’을 넘어 서기까지

 

무더위로 온 감방이 헐떡이던 1999년 6월 어느 날. 감방문을 따는 소리와 함께 계호가 우리를 모두 불러냈다. 신발장의 슬리퍼를 찾아 신고 복도에 나서자, 계호들이 1대1로 붙어 예심과로 인솔했다. 예심과 에는 낯 있은 보자기와 먹을 것, 옷가지들이 놓여져 있었다.

 

도안전국 예심원이 밖을 향해 “다 들여보내라”고 소리쳤다. 방안으로 들어오는 어머니와 성수 아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는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다가 왔다고 생각했다. 여태 구류장에서 가족과 동료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면회시킨 적이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떠나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서로 만나게 만든 것이다.

 

도 예심원은 “이제부터 10분간의 시간을 주겠다. 할 소리가 있으면 빨리 하라. 너희들은 오늘 저녁 도에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예심과장과 간수장도 “도에 올라가면 밥도 많이 주고 좋지”라고 빈정댔다. 

 

어머니의 손과 얼굴을 보니 울음이 북받쳤다. 꺼칠한 얼굴과 투박한 손은 어머니의 그간의 고생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리들을 옥바라지 하느라고 몸이 몹시 험하게 변했다.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할 자식들이 오히려 폐를 끼쳤으니, 할말이 없었다. 그냥 어머니는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광혁이 엄마 한데는 알렸는데, 나오지 않는구나. 민정이는 얼음장사 나가서 오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했다. 

 

어머니는 바닥에 놓인 음식그릇 앞에 우리를 하나씩 자리에 앉혀 수저를 들려주신다. 배불리 먹이고 떠나 보내고 싶어 양동이에 밥을 가져왔다. 옥수수 떡도 한 사람 앞에 세 개씩 차려졌다.

광혁이 엄마는 아마 주위의 눈치도 있고 해서 나오지 못한 것 같았다. 무슨 좋은 일이 있어 감옥까지 찾아 오겠는가,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도 한때 노동당원이고, 학교 간부로 숱한 학생들의 귀감이 되어 살았던 핵심계층이 아닌가, 그런데 나를 망신을 하게 되었으니, 어느 여성인들 그런 모욕과 치욕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우리의 옷을 갈아 입히고 신발도 신겼다. 손수 신발을 신겨줄 때 그 미안함과 세상에 대한 야속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를 잔등에 업고 다니며 이세상 누리지 못한 행복을 다 안겨주고 싶다.

 

한 10분이 지났을까, “면회 그만. 짐을 정리하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서라.”는 구령소리가 들렸다. 저녁 차를 타고 도에 올라가야 한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한 손에 족쇄를 채웠다. 나와 짝이 된 민혁이는 손을 감싸 쥐고,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고 속삭인다. 

 

“법을 어기면 이자들처럼 된다” 거리로 행진시켜

 

낮 3시쯤 되어 우리 일행은 도시 한복판을 가로질러 역전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땡볕이 내려 쪼이는 도시는 몹시 더웠다. 빡빡 머리를 한 죄수들이 지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들 속에는 어제날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동정의 눈길을 보냈고, 어떤 사람들은 경악의 눈길이다.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면 저렇게 되는 구나 하는 놀람이다. 

 

역전에 도착하니, 연착된 차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우리는 개찰구 앞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찬물을 떠다 주었다. 그 동안 우리를 담당했던 시 안전부 예심원은 민수에게 무언가 계속 훈계를 하고 있었다. “이번 너희 사건에서 딱 한가지가 확인이 안돼 도에 올라간다. 도에 올라가 잘 비판하고 내려와”라는 회유다. 그러자 민수는 “우리가 살아 나올 수 있나요? 다 비판했고 더 이상 아는 게 없다”고 대꾸한다.

 

예심원은 “살아 나올 수 있지 않고, 비판만 잘하면 살아 나올 수 있다”고 회유한다. 우리를 도안전국에 인솔할 사람은 계호책임자와 시 예심원이었다. 열차에는 우리를 감금할 호송칸이 따로 없었다. 일반 주민들이 앉는 의자 두 개를 따로 내어 거기에 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고 동정의 눈길을 보내면서 “쯧쯧,, 뭘 하다 저렇게 잡혔나, 살기 힘든 세상에 감옥에 들어가면 밥이라도 제대로 주는가”며 혀를 내두른다.

 

덜커덩거리며 근 10시간 달린 기차는 드디어 도 소재지에 도착했다. 다행히 새벽이어서 역전 뒤쪽으로 빠져 나갔다. 어둠이 깃든 역 구내를 벗어나, 도안전국이 자리잡은 00구역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계호원들은 우리의 도주를 우려해 살갑게 대했다. 어둠을 이용해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탈출할 수 없었다. 설사 탈출한다 해도 빡빡 깎은 머리가 문제였다. 곳곳에 주민신고체계가 있기 때문에 복장과 인상착의만 알려지면 체포되는 것은 시간문제. 더욱이 영양실조자 들이기 때문에 반항도 못하고 곧 붙들리게 된다.

 

도안전국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길다랗게 놓인 도 구류장이 마주 보였다. 보기에도 스산한 철창과 안전원들이 또 눈에 보였다. 우리를 호송했던 계호책임자와 예심원은 도안전국 계호들과 인사를 나누고 우리와 작별했다. 도안전국 계호들은 우리를 불러 검신(檢身)을 하고 한 사람씩 감방에 집어넣었다.

 

다른 죄수의 ‘장물’ 물으면 몰매 맞아

 

도 안전국 계호들은 모두 소위 급 장교들이다. 보기에도 이들은 시안전국 계호들보다 행동거지가 틀렸다. 묵직하게 말을 뗐고, 악착 하게 죄수들을 구박하지 않았다. 도안전국에는 전과자들과, 중 범죄자들이 많았다. 전기선을 자르고, 소를 다수로 도살하고, 집단 강도범들을 비롯해 적어도 10~15년, 심지어 사형수들이 많았다.

 

도 구류장에서의 6개월 기간은 나에게 있어 지옥의 문턱에 온 절망 그 자체였다. 내가 8호 감방에 들어서자, 얼굴색이 하얀 수십 명의 죄수들이 나를 응시했다. 보기에도 섬뜩한 눈길이 나를 향해 집중되었다. 그들은 나에게 송장냄새가 나는 모포 한 장을 던져주며 똥통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정해주었다.

 

저마다 “야, 너 왜 들어왔어?”라고 묻는다. 나는 “탈곡장에 옥수수 훔치러 갔다가 잡혔다”고 응대했다. 이때 철창 밖에서 “어디야! 어디서 쏙닥거렸어”라는 쇳소리 같은 소리를 지르며 한 계호가 달려왔다. “어느 놈이야! 당장 나서지 못 나오 갔어?”라는 호령이 들려왔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그 앞에 나가 섰다.

 

“예, 접니다” “뭐라고 말했어?” “앞에 있는 수감자가 왜 들어왔는가 고 물어보았습니다” 라고 말하자, “물어본 놈 당장 나오라”고 소리질렀다.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나오면 몰매를 맞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때 맨 앞에 앉았던 감방장이 뒤로 들어가 나에게 말을 시켰던 죄수의 목덜미를 잡고 나왔다.

 

계호원은 감방장에게 “이놈의 새끼가 처음에 들어와 정신이 덜 들었으니, 네가 좀 일깨워줘라”고 호령했다. 감방장은 모두발로 나의 가슴을 들이 찼다. 이윽고 나에게 말을 시켰던 그 죄수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순간 그 죄수는 거품을 물고 마루바닥에 늘어졌다. 처참한 광경을 보고야 그 계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물러갔다.

 

도안전국 구류장에는 이와 벼룩이 대단히 많았다. 낮에도 마루바닥에서 기어 나와 죄수들의 등을 사정없이 물어 뜯었다. 여기 저기서 옷을 벗어 이와 벼룩을 잡는다. 죄수들의 잔등은 온통 벼룩이 물린 피 자국으로 얼룩졌다. 시 구류장에서는 아무리 벼룩이 물어도 까딱하면 뭇매를 맞았지만, 도 구류장에서는 옷을 벗어 이를 잡는 죄수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어 한결 나았다.

 

도안전국 사건으로 재 조사를 받다

 

하루가 지나자, 도 예심원이 우리를 차례로 불러냈다. 이제부터 문건을 다시 작성한다는 것이다.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그가 작성한 서류는 장편소설 한 권 분량이 되었다. 그는 우리를 한 사람씩 불러 시안전부에서 진술했던 사건 전말에 대해 하나씩 새롭게 작성했다.

 

한 열흘이 지났을까, 감방 문을 열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도 검찰소 검사가 도 안전부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아 검사심문을 위해 온 것이다. 북한 안전부는 검사의 수사지휘권에 따라 사건을 진행하게 되어있다. 안전부 예심원은 사법경찰관으로 검찰의 동의를 얻어 죄수를 취급하게 되어있다. 시 안전부에 있을 때 안전부를 담당한 시 검찰소 부부장이 찾아왔었다. 

 

도 검찰소 검사는 우리를 만나 사실을 확인시키고 다시 지장을 받았다. 만약 우리가 부인한다면 도 예심원은 다시 사건을 진행해야 한다. 때문에 도 예심원은 우리의 부인을 막기 위해 검사심문에서 다 인정해야 사건이 빨리 종결된다고 말해두었다.

 

도 검사가 다녀간 지 한 달쯤 지났을까, 다시 도 재판소 판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60세 가까이 돼보이는 나이에 위험을 느껴서인지 도 예심원을 함께 불러 우리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심문이라기 보다 확인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는 “자, 이젠 지루한 구류장 생활을 빨리 마무리 하고 재판을 받자”며 “너희들은 신수가 좋다고 생각하라. 작년 같으면 전부 이세상 사람이 아닐 놈들인데…”라며 허접게 웃으며 사건 철을 덮었다. 우리는 결정적인 시각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이제 만사람 앞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을 살든, 사형을 당하든 판결이 날 것 같았다.

 

“통신선 절단자는 나라의 신경을 끊는 해독분자”로 사형당해

 

도 안전국 구류장에는 13개의 감방에 여자 죄수와 남자 죄수를 따로 갈라 수감하고 있었다. 1호 감방은 남자,

 

2호 감방과 4호 감방은 사형수들만 따로 감금하는 일명 ‘따당 칸’이라고 부르는 사형수 칸이다. 2호에는 남자, 4호 감방에는 여자 사형수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그 나머지 1호, 3호, 5호는 남자, 6호부터 여자 칸을 하나 건너씩 감금하고 있었다.

 

13호 감방은 판사, 검사, 안전원들이 범죄처리 과정에 뇌물 수수, 횡령, 불법 내통해 잡혀온 법 기관 범죄자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또한 일반 죄수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가진 거물급 죄수들과 증거인멸 우려가 있는 수사단계에 있는 죄수를 수감했다.

 

2호 감방과 4호 감방의 사형수들은 이미 죽음의 선고를 받고 하루 하루 절망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들은 재판 전에 여타 감방에 감금되었다가 재판을 받고 ‘따당칸’에 들어가 ‘상소기간’ 75일을 보내게 된다.

 

소 도살꾼, 통신선 절단자는 크기에 관계없이 용서가 없었다. 내가 있던 8호 감방에 40대의 명철이라는 00군 출신과 xx군 출신의 진철이가 잡혀 들어와 있었다. 명철이는 전과자로 통신선 1,500m를 잘라 밀수하다 체포되어 들어왔다. 진철이 역시 전봇대의 맨 위에 있는 1호통신선 800m를 잘라 팔고 체포되었다.

 

명철이는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며 “난 절대 죽지 않아. 한 10년 먹고 들어갈 것이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감방문이 열리면서 “명철이 나오라”고 부르는 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철이는 벌렁 벌렁 기어나가 바람벽에 붙어 섰다. 계호는 그의 손에 족쇄를 채우고 00군 공개재판장으로 향했다. 

 

도 구류장에 갇힌 죄수들은 도 안전국에서 예심을 받고, 재판은 현지에 내려가서 받게 된다.
00군 공개재판장에 나간 명철이는 “나라의 신경을 마비시키기 위해 1호 통신선을 잘라 중국에 팔아 먹은 명철이를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문 앞에 고개를 떨구어야 했다.

 

저녁쯤 되어서야 2호 감방 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야, 명철이 소지품 내오라”고 소리치는 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판 받기 전에 8호 감방에 있었으니, 명철이의 소지품이 우리 감방에 있었다. 우리는 명철이의 버선과 동복 등을 내보내 주었다. 간수는 그의 소지품을 발로 질질 끌고가 2호 감방 앞에 던져버리고 명철이 더러 손을 꺼내 들여 가도록 했다.

 

“소도적은 살인자와 같다”

 

구류장에는 소를 잡아먹은 사람들도 많았다.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 소는 국가 소유로 되어 있다. 소는 전쟁을 대비해 역축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소 도살자는 ‘살인죄’만큼의 엄벌에 처해진다. 북한주민들은 소고기를 거의 먹어볼 수 없다. 국가소유이기 때문에 자기가 관리하던 소가 죽어도 마음대로 처분을 하지 못하고 상부에 올려간다. 먹을 식량도 없어 허기진 주민들은 들판에 다니는 소나 개를 보면 환각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관리가 허술한 국가의 소에 눈독을 돌리게 된다.

 

실제로 개인들이 키우는 돼지나 개는 철창에서 잘 키우지만, 농장 소들은 산에 그냥 매두거나, 경비가 허슬한 외양 칸에 방치해둔다. 소 도적들은 밤에 소를 끌어다 산에 올라가 도살하고는 고기를 발가내고 뼈는 버린다. 협동농장 단체들은 소를 잃어버린 다음 신고나 하고 별로 아까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허슬한 관리 때문에 식량난 때 한 사람이 무려 10마리 이상 소를 잡아 먹은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소를 잡아 먹는 것이 ‘살인죄’ 정도의 죄에 속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를 잡아 먹는다.

 

굶어 죽으나, 맞아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니 결국 명을 하늘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다. 00군에서 올라온 한 소도적은 무려 아들, 딸, 사위와 공모해 19마리의 소를 잡아 먹었다. 이들 주모자는 사형에 처해지고, 딸은 10년, 사위는 15년씩 먹고 교화소에 끌려갔다.

 

하루는 영남이라고 하는 다른 죄수가 들어왔다. 그는 00군 군수공장에 다니다가 배가 고파 중국사람들이 동을 산다는 소문을 듣고 군수공장 전력선 케이블을 잘라 팔았다. 그 역시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감옥에서 본 사형수들은 대체로 자기가 죽을 줄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살려면 죽고, 오히려 죽으려면 산다”고 죽을 각오로 배포한 사람은 살고 살기 위해 비굴하게 구는 사람은 죽는 경우가 많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75일, 상소기간은 형식에 불과해
 
북한 법원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들에게 75일의 ‘상소기간’을 준다. 75일 동안 본 재판판결에 대해 이견이 있으면 제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의 제기는 형식일 뿐이고, 실은 사형수의 가정 내력을 샅샅이 뒤져 빨치산 연고자, 대남공작원, 비행사, 당 일꾼 등 핵심연고자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 하는 것이다. 만약 연고자가 있으면 형량을 낮추어 살려주고, 없으면 죽인다. 북한핵심계층의 약화를 막기 위한 것이다. 

 

75일의 주어진 시한부 동안 사형수들은 사투를 벌인다. 죽기 전에 어떻게 해서나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다른 감방에서는 죄수들끼리 그래도 빛 바랜 동정이 오고 갔지만, 사형수 칸에는 동물적인 생존경기가 벌어진다. 대표적인 것은 사형수들끼리 “몰아치기’를 한다. 죄수에게 공급되는 밥을 차례가 된 죄수에게 집중적으로 몰아주는 방식이다. 몰아치기를 하는 사람들은 국물만 먹고, 나머지 밥을 한 사람에게 몰아준다. 그러면 차례가 된 죄수는 그 밥을 비닐에 싸서 짓이겨 떡을 만들어 먹는다. 죽기 전에 그렇게 해서라도 떡 맛을 보기 위해서다.

 

간수들은 ‘몰아치기’를 하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몰아치기’를 하면 밥을 굶는 죄수들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떡을 먹은 죄수는 과식해 설사를 하게 된다. 도 구류장 규정에 영양실조를 막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간수들은 엄격하게 통제했다. 죄수들이 죽어나도 눈썹 하나 까딱 않는 시 안전부 구류장과 판이하다.

 

75일이 지나자 “명철이 나와”라는 계호원의 소리가 들리고, 손을 뒤로 묶었다. 사형수들은 나갈 때 손을 뒤로 묶는다. 사형수가 뒤로 묶이면 동료죄수들은 저마다 그의 모포와 소지품을 차지하느라 싸움을 벌인다. 그 날밤은 사형수가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명철이는 소형트럭에 실려 사형장으로 나갔다. 소형트럭은 00군 외화벌이 사장이 타던 승용차를 그가 구류장에 끌려온 다음 도 안전국에서 사형수 운반전용 차로 압수한 것이다. 명철이가 끌려간 후 얼마 안 있어 진철이도 끌려나갔다.

 

 “금 사건은 용서가 없다” 권력싸움에 끌려온 금광 지배인

 

구류장에는 금을 120킬로그램이나 빼돌리고, 잡혀온 금광 지배인도 있었다. 원래 ‘치안대’자식이던 그는 일을 잘해 열성분자로 등록되어 당의 신임을 얻어 지배인의 지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 지방의 군당책임비서, 조직비서 등 고위관리들도 그의 금을 먹지 않은 간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위세는 도고했다. 

 

인근에서 유력자로 손꼽히던 그가 그곳 군당 조직비서와 군 안전부장의 세력싸움에 말려들게 되었다. 사과 밭에서 사과를 먹지 않는 주인이 없다고 금 다루는 사람이 금을 먹지 않았을 리 없다.

그의 체포과정이 아주 극적이었다. 군당 조직비서와 군 안전부장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서로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이 났었다. 안전부장이 조직비서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뒷조사에 나섰는데, 지배인과 조직비서와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전부장은 틀림없이 조직비서가 금을 횡령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배인을 잡아 넣기 위한 작전을 짰다.

 

먼저 금광 회계원을 잡아 들였다. 회계원이 지배인의 비리를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전부 경제 감찰과에서 금광 회계원을 감금하고 옥중편지를 쓰도록 강요했다. “지배인 동지, 내가 모든 것을 다 안고 갑니다. 나는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가택수색이 예견되니, 빨리 손을 쓰기 바랍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회계원의 옥중 편지를 받아본 지배인은 허둥지둥 직장의 소련제 ‘까마즈(소련제)’ 화물자동차를 타고 금이 감추어진 창고에 들어섰다. 땅에 묻은 3kg의 금을 파내는 순간 사복한 경찰이 들이닥쳤다. 현장에서 검거된 지배인은 곧바로 00군 안전부에 구류되었다. 그러나 그와 결탁되었던 고위급 간부들의 석방압력이 쇄도했다. 그와 연관된 조직비서도 안전부장에게 수사를 중단하고 그를 석방할 데 대해 지시를 내렸다.

 

안전부장은 중앙당에 이 사건을 보고하고 도안전부 구류장으로 지배인을 압송했다. 도 안전부에 끌려온 지배인은 그간 신세 지은 간부들이 많은지라, 배포유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전원들의 회유와 강압적인 고문으로 그의 도고한 기세는 차츰 꺾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고위층들에 대한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다.

 

안전원들은 “너도 어리석다. 네가 감옥에 잡혀있는데, 조직비서가 너를 면회 오냐, 일단 사람이 똥 칸에 잡히면 끝장이야, 모두 네가 나쁘다고 뒤에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데, 네가 무슨 미련이 있어 그들을 감싸줘. 빨리 솔직히 비판하고 네가 살 궁리를 찾아야지”라고 회유하기 시작했다.

 

터질듯한 고민 때문에 살은 쭉 내리고 자살을 시도하던 지배인은 마침내 생각을 고쳐먹고 하나 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충성의 외화벌이’명목으로 장부에 금 5kg을 바치고 실제는 6kg을 조직비서에게 보내 1kg을 뇌물로 바치고, 금광 후방공급에 3kg, 자동차 타이어, 착암기 등 각종 경조비에 금을 돌려썼다.

 

남한사람들은 금광주가 금을 팔고 사는데 무슨 대수냐고 생각하겠지만, 북한에서 금은 오로지 김정일의 결제가 없이는 한 그램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있다. 만약 10g만 팔아도 반역죄에 걸려 감옥에 잡혀가야 한다. 김정일은 개인들이 마음대로 금을 매매하지 못하게 하고 온 나라의 황금을 자기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도당 간부부장, 조직비서, 00군 조직비서, 선전비서 등 수십 명의 고위급 간부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지배인이 이렇게 빼돌린 금은 무려 120kg에 달했다. 이 사건으로 지배인은 사형당했고, 연루된 사람들은 옷을 벗고 해임되었다.

 

내가 처음 본 탈북자들, “석방되면 중국으로 뛰자”

 

1999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감방 문 따는 귀를 째는 듯한 소리가 잇달아 들리고, 여러 명의 죄수들이 무리로 들어왔다. 우리감방에도 20대의 젊은 청년이 불쑥 뛰어 들어왔다. 간수는 감방을 향해 “야, 지금 들어온 놈들과 절대로 말하지 말라, 말하는 놈이 있으면, 없다!”고 호령했다.

 

그러나 호기심이 가득 찬 죄수들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은근히 접근해 그들에게 장물이 뭔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죽을 가봐 걱정을 하는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운동시간을 이용해 그와 접촉했다.

 

“야, 너 왜 들어왔어?” 라고 묻자, 그는 “중국에 갔다가 잡혔어”고 말했다. 탈북자는 처음이었다. 내가 “중국이 어때?”라고 묻자, 그는 “중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몰라. 굶어 죽는 사람도 없고, 일만 하면 하루에 인민폐 20원은 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감방사람들에게 중국의 개혁개방과 중국의 시장경제상황을 신명 나게 이야기 했다. 그의 말을 들은 죄수들의 얼굴에는 화기가 돌았다. 중국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전기선은 왜 잘랐고, 소는 왜 잡아 먹고 이렇게 감옥에서 죽어야 하는가”라며 후회다. 탈북자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죄수들뿐이 아니었다. 간수들도 철창 앞에 다가와 탈북자들에게 중국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물어보곤 했다.

 

심양과 산동성까지 갔다가 잡혔다는 한 탈북자는 중국에 있는 3년 동안 돈도 꽤 벌었고, 중국말도 아주 잘했다. 그는 중국에서 약 2년 있으면 중국말을 할 수 있으며, 말만 배우면 직업을 얻기도 쉽고, 돈도 벌기 쉽다고 말한다. 그는 만약 자기가 베이징에 오지 않았다면 붙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중국 돈 5천원을 가지고 나오다가 안전원들에게 회수당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던 영남이는 “저것 봐라. 우리가 여기서 배 곯을 필요가 있는가, 탈북자들도 용서받는데, 우린 죽잖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야, 민호, 병 보석으로 나가면 우리 집에 오라. 같이 중국 나가자”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신심이 생겼다. 감옥에서 나가면 꼭 중국으로 가리라 마음먹게 되었다.

 

며칠 지나자 탈북자들을 불러내 도 안전국 집결소로 압송해갔다. 도 구류장에서 초보심사를 마친 다음 도 집결소에 보냈다가 다시 자기 지방 안전부로 이관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탈북자가 발생하면 전국에 수사선포를 내리고 중국에 수사공조를 하는 등 정치적으로 다루었지만, 2000년 들어 탈북자들이 하도 많아 한국과 선교사들을 만났다는 증거만 없으면 안전부 사건으로 처리했다.

제 나라에서 살겠다고 몸부림치던 사람들은 감옥에서 중형을 받고 죽어가지만 중국으로 탈출했던 사람은 관대한 용서를 받는 것이다.

 

도 집결소에 나갔던 다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도 집결소에 탈북자들이 수백 명씩이나 되는데 그들은 인민폐를 감추어 가지고 들어와서는 간수들더러 음식을 사오게 해서는 감옥에서 먹는 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히려 안전원들을 부리는 셈이다. 안전원들도 그들에게서 돈이라도 좀 빼앗을 가하여 빌붙는 것이다.

 

“北인권 압력 가해야 인권탄압 문턱 낮아져”

 

이렇게 2000년 새해가 밝았다. 21세기를 맞는 전체 감옥의 느낌은 새로웠다. 모든 수감자들은 “21세기를 맞아 큰 대사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근 500일 동안의 감옥생활에 나는 형 둘을 감옥에서 잃었다. 굶주리고 병들어 옆 감방에서 운명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거두어 주지 못했다. 고난의 행군시기 살기 위해 몸부림쳐온 수백만 아사자들 속에는 나의 형들도 있었다.

 

우리일행 중 3명이 죽어나자, 남은 사람들도 다 죽을 가봐 걱정스러웠던지, 도 안전국 계호책임자가 우리를 불러냈다. 우리 얼굴을 찬찬히 보고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계호들에게 뭔가 지시를 했다. 얼마 안 있어 한 계호가 들어와 우리에게 병보석방 수속을 한다고 알려줬다.

 

줄줄이 불려나간 우리는 계호장 앞에서 “절대로 도망을 하지 않으며, 도 안전국 구류장에서 본 일체 사실에 대해 비밀을 엄수 할 것”을 서명하고 석방되었다. 오랜만에 손에 족쇄를 채우지 않고 도로에 나섰다. 겨울이라 다니는 기차도 없었고, 자동차는 더욱이 없었다. 우리를 호송하는 안전원들은 우리더러 서로 손을 마주 잡고 도로를 가로 막도록 했다. 자동차를 막으려는 것이다.

 

빡빡머리들이 도로를 가로막고 앉아 있자, 운전사들도 무서워 차를 멈추고 우리를 태웠다. 이렇게 아침에 떠난 우리는 그날 밤 12시가 되어서야 우리 집이 있는 00시로 내려올 수 있었다. 암흑이 잠긴 마을 속에서도 어렴풋이 우리가 체포되던 그 집, 호송되던 성천강 다리 등이 보였다. 갖은 고문과 혹독한 추위, 굶주림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그 힘의 원천은 꼭 살아서 좀 더 보람 있게 살아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나는 집 문을 두드리고 어머니를 붙잡고 어린애마냥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는 굵직한 손으로 우리를 쓰다듬으며 “살아 돌아왔구나, 그럼 너의 형들은….”라며 말씀을 잇지 못했다. 안전원들도 그때만큼은 호령하거나 죄인 취급을 하지 않았다. 석방되었으니 공민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훗날 나는 우리가 살아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식량난을 겪으면서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체면을 던져 버리고 국제사회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식량, 의료지원 등 도움도 많이 받았고, 국제사회의 압력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먼저 탈북한 인사들이 유엔과 유럽 등지를 돌며 북한인권의 참혹상을 알리는 활동을 진행했다.

 

국제사회는 북한인권개선을 위한 목소리도 높였다. 북한인권의 목소리는 높이면 높일수록 북한당국이 그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국제사회와 교류와 지원, 협력 등에 상호주의로 인권을 꺼내 드는데 대해 불쾌감, 혹은 인권유린이 없다고 반발한다. 그러나 인권을 강조하면 할수록 반 인륜적인 인권탄압행위의 문턱이 점점 낮아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북한인권의 목소리를 더욱 높여줄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