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발에 찢겨 손 터져도 하소할 곳 없어
 
90년대 중반 북한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감옥에서 2년 가까이를 보낸 나는 현재의 남한생활이 꿈이 아닌가 싶다. 돌이켜 보면 당시 상황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찌 사람이 죄를 짓고 싶어 짓나? 범죄에도 물론 상습범이 있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을 것이 없어 한 순간의 실수로 저지른 범죄는 그것을 유발시킨 국가도 응당 책임을 감안해야 한다.

 

오늘도 감옥 안에서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으며 기약 없이 죽어갈 수십만의 생계 형 범죄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알리고 싶다. 또 법치주의가 아닌 마지막 공산독재국가의 이면을 들춰내어 세상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생겨 조금도 과장이 없이 보여주고 싶어 펜을 들었다. 

 

감옥안의 죽은 죄수가 나가자 다른 죄수들은 저마다 그의 모포를 차지하느라 싸움을 벌였다. 이와 벼룩이 툭툭 떨어지는 송장냄새가 나는 모포라도 감싸고 있으면 추위를 덜 탈 수 있었다. 연한이 있는 죄수들은 보통 두 개의 모포를 가지고 자는데 갓 들어온 죄수들은 얇은 모포 한 장을 절반은 깔고 절반은 덮고 잤다. 

 

구류장 바닥은 나무판자였다. 나무판자 사이에는 비듬과 먼지가 범벅이 되었는데, 벼룩이의 둘도 없는 서식지이다. 가만 있으면 구멍 뚫린 사이로 무리로 나와 사람을 물어 뜯는다. 또 밤이면 더욱 덤빈다. 굶주린 기생벌레는 피기 없는 죄수들이라고 용서가 없었다.

 

12월의 추위는 감방 전체를 꽁꽁 얼군다. 내가 입은 내의는 이와 벼룩이 문 자리에서 난 피자국으로 범벅이 되고, 점퍼의 옷깃마다 하얀 이가 강변의 모래알처럼 들어 붙는다. 더욱이 운동하기 싫어하고 허약한 죄수일수록 이는 더 붙는 것 같았다.

 

한옥길이라고 부르는 한 탄광노동자가 붙잡혀 들어왔다. 그는 배가 고파 탄광 전기 케이블 30m를 잘라 팔아 먹고 ‘해독 분자’로 몰려 잡혀 들어왔다. 키도 작고 그는 광차에 치워 손가락을 죄다 잘리어 한 손이 없었다.

 

성태라고 부르는 계호가 교정시간에 움직였다고 하여 철창앞으로 그를 불러냈다. 그는 손을 앞으로 내밀라고 호령하고 징박은 구두발로 그의 몽툭한 손을 사정없이 내려 밟았다. 그는 ‘악’ 소리를 지르면서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성태는 꾀병한다고 더 사정없이 내려쳤다.

 

옥길이의 몽툭한 손은 피범벅이 되었고, 그날 저녁부터 꿍꿍 소리를 내면서 통증을 사정했다. 다음날 아침 모포로 둘둘 만 그의 손은 퉁퉁 부어 오르고 피고름이 져서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한쪽 팔마저 잘라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구두 징에 박힌 못에 찢겨 파상풍 병에 걸린 것이다. 성태는 간수장에게 이야기 하여 석방시키자고 했다. 그를 석방시키지 않으면 당장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옥길이를 부르는 소리가 나고 그는 벌벌 기어 밖으로 나갔다. 죽어도 밖에 나가 죽겠다는 인간의 의지는 강렬한 것이다.

 

그가 떠난 지 며칠 후, 탄광에서 또 한 사람이 붙잡혀 왔다. 이번에는 폭약 30kg을 팔아 먹은 죄었다. 폭약 범죄는 김일성 김정일 연구실 안전문제 때문에 엄격하게 처리했다. 폭약을 찾는 사람들은 금광의 금을 캐기 위해 구하는 사람들과 물고기를 잡아먹으려고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다리나, 연구실을 폭파하려는 사람들도 간혹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감옥을 나간 옥길이가 3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머리에 똥을 뒤집어 써도 할말 없어

 

저녁 5~6시가 되면 죄수들이 면식(면회) 밥을 먹는 시간이다. 예심원들이 퇴근하기 전에 가족들이 가져온 밥을 먹이는 것이다. 또 가족들은 이 시간에 맞춰 밥을 가지고 들어온다. 가족들은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예심원이나, 간수들에게 중국담배를 가져다 바쳐야 한다.

 

중국담배 한갑에 당시 북한돈 50원씩 했다. 쌀 한 킬로그램에 100원씩 했으니, 가족들이 면식밥을 한끼 싸오려면 그것도 만만치 않았다. 중국담배를 살수 없는 가족들이 북한산 싼 담배를 가져오면 안전원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밥도 먹이지 않는다.

 

“학철이, 철수…”죄수들을 부르는 간수들의 이름이 연방 울리고, 감방문을 여는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죄수들이 불려 나간다. 한 30분 지나면 죄수들이 건 트림을 하면서 들어온다. 감방 안에 있는 죄수들은 부러운 눈으로 군침을 삼킨다. 밖에 나갔다 들어온 죄수들이 떡 조각이라도 가지고 들어오지 않겠는가 해서 눈이 흘긴다. 죄수들은 끼리끼리 패가 있어 자기와 친한 사람에게만 떡 조각을 나누어 주었다.

 

학철이라고 하는 죄수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다. 과식을 하고 들어온 그는 간수의 승인 없이 변기에 앉았다. 변기는 감방 맨 앞에 있기 때문에 온 감방의 죄수들의 눈길이 그이 거동에 집중됐다. 설사를 만난 그는 내장 썩은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냄새는 곧 감방 안을 진동했고, 간수의 코를 자극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야! 순순히 나오라”고 갑자기 호령소리가 들리고 뱁새 같은 영수라는 계호가 들어왔다.

 

변기에 앉은 학철이는 홍문을 다물지 못해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했다. “야, 너 거기 거꾸로 서라”고 영수는 호령했다. 학철이는 똥이 가득한 변기에 손을 뻗치고 거꾸로 섰다. 처음에는 서지 못하자, 간수는 감방장에게 그를 거꾸로 세우라고 지시했다. 떡봉이는 그의 다리를 천정으로 치켜세웠다. 순간 그의 외투는 아래로 드리어 머리를 가리웠다. 솜옷에 똥이 발리고 팔 힘이 빠진 그의 머리는 똥 속에 틀어박혔다. 

 

감방안에는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라고 처량하게 애원하는 학철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열흘 만에 본 아내모습, 철부지 아이에게 용서를 빌다

 

한 주일이 지나자 집에서 면회가 왔다고 불렀다. 수사과 사무실에 나가니,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는 한 살짜리 아들애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죄책에 무엇인가 목에 꽉 걸렸다. 아내에게 미안함과 함께 아직 철도 모르는 아들에게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아내는 시커멓고 수염이 부스스한 나를 보며 억이 막혀 “광혁이 아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라고 오열한다.

 

두부와 고기 반찬을 싸온 아내의 밥그릇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나는 “빨리 처먹으라”고 재촉하는 간수의 호령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꺼이 꺼이 입안으로 밥을 몰아 넣었다. 

 

불과 5분이나 지났을까, “일어서라!”는 간수의 호령이 떨어지고, 아내와 헤어질 시각이 다가왔다. 아들애도 눈을 빠근히 뜨고 나를 일별한다. 족쇄에 묶인 손을 애써 감추며 나는 구류장으로 향했다. 결혼한지 2년이 되도록 나는 아내와 집이 없어 결혼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제 겨우 집을 사가지고 재미있게 살만하니 감옥행이라니, 참 불행한 신세였다.

 

집에서 어머니가 겨울 동복과 내의를 가지고 다시 찾아왔다. 1월 1일도 다가왔는데, 명절을 함께 쇠지 못한다며 강냉이 떡도 가져왔다. 여동생 민정이는 귀속말로 “오빠, 내일 시당 안전위원회를 하는데, 끝나면 석방된대”라고 말한다. 속으로는 기뻤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이미 다 확정된 상황에서 한둘도 아니고, 여러 명을 한꺼번에 석방된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혹 하늘이 무너지거나 전쟁이라도 일어나기 전에는 도저히 살아 나갈 수 없는 지옥이었기 때문이다. 

 

투박한 손으로 옷을 꺼내주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아버지도 화병에 몸져 누웠다고 한다. 형제 4명이 모두 잡혀왔으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날벼락이 어디에 있을까,

 

찬기운이 감도는 1999년 1월 1일 아침이 밝았다. 아홉 고개를 넘기가 어렵다더니, 내 나이 29살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잠시라도 마음을 나약하게 먹으면 더러운 감옥에서 주검이 되어 나가야 했다.

 

설날 아침 녹 쓴 알루미늄 그릇에 김이 나는 통강냉이를 바라보노라니 집에 있을 때 그나마 먹던 설 음식이 그리웠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쯤 집에서는 또 얼마나 부모님들이 마음이 쓰릴까?

 

1월 3일이 되어서야 어머니가 밥을 가지고 감옥에 찾아 왔다. 어머니가 싸온 밥을 보는 순간 점점 집안 살림이 쪼들린 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쌀밥을 가져오던 어머니가 밀밥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버지가 배급으로 탄 밀알을 갈아 강냉이와 섞어 밥을 지어왔던 것이다. 거기에 옥수수 떡이라도 가져오면 돌덩이 같았지만,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어제 날의 ‘삼촌’, 오늘은 극과 극에서 문초 당하다

 

다음날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됐다. “민호 나오라”는 간수의 호령이 들리고 엄지 손가락만 묶는 족쇄를 철창 안으로 들이 밀었다. 엄지손가락만 묶는 족쇄는 중범자들에게만 하는 행위여서 겁이 버럭 났다. 철창 안에서 족쇄를 채운 간수는 철창문을 따고 나를 끌어냈다. 처절한 심정으로 신발을 신고, 다음은 정신이 아찔해 났다. 근 보름 만에 햇살을 보니 마음이 개운함과 동시에 허탈감이 소용돌이 쳤다.

 

과연 이제 어떤 질책이 쏟아질까, 이미 신의주로 동을 가지고 갔던 사건도 드러났고, 농장 탈곡장에 무리를 지어 갔던 사건도 다 드러난 뒤여서 더는 교화소에 가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형사처리가 되지 않으려면 보름 전에 석방되어야 하나 이미 보름이 된 상황에서 석방시킬 잡도리는 아니었다. 

 

중좌(중령)의 계급장을 단 포악하게 생긴 안전원이 앉아 있었다. 시안전부 사건담당 부부장이다. 얼굴을 들어 그를 보는 순간, 낯익은 얼굴이다. 아버지가 위원장을 할 때 집에 찾아와 술을 같이 마시던 사람이다. 한때 아버지에게 형님, 삼촌하면서 안면이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적의가 번뜩였다. 어떻게 하면 죄를 더 많이 들춰낼 것인가는 그자의 눈길과 제발 살려주었으면 하는 내 눈길이 서로 부딪쳤다. 

 

“너의 무리들이 모두 몇 명이지?” 처음부터 위압을 주는 질문이다. “5명입니다”나의 죽어가는 소리에 “너희들은 강도야. 좀 전 같으면 너희들은 매달아 놓고 다 쏴버릴 놈들이야”라고 단 마디로 외친다. 

 

나는 진술서에 도장을 찍었다. 벌써 손 지장을 찍은 문서만도 장편소설 한 권은 실히 될 듯 했다. 현관을 나오는 사이 안전부 이발사와 스치게 되었다. 그도 나와 안면이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당시는 그 어느 누구도 나를 구원해줄 사람은 없었다.

 

눈물로 쓴 옥중편지

 

한동안 아내가 감옥으로 찾아 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겁이 났고, 한쪽으로는 아내를 의심하기도 했다. 나는 아내에게 죄송한 마음을 담은 옥중 편지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영어(囹圄)의 몸이 된 주제에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금방 석방되어 나가는 출옥자도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전하기로 했다.

 

펜을 찾았지만, 단추 한 알 없는 헌 옷을 입은 처지에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죄수들에게 물어 바늘을 하나 얻었다. 그 바늘은 밖에 나갔던 한 죄수가 가지고 들어온 옷 빈침을 갈아 만든 것이다. 빈 종이를 얻어 바늘로 글 모양으로 꼭꼭 찍어 나의 절절한 심정을 담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보, 미안하오. 당신도 모르게 살자고 했던 것이 결과가 이렇게 되었으니, 용서하길 바라오. 끝나고 나가면 잘 해드리겠으니, 참고 기다려주오” 이렇게 쓴 나는 종이를 돌돌 말아 명철이라는 죄수의 손에 쥐어주며 “부탁한다. 우리 집에 가서 이 편지를 주고, 솜옷을 가지고 가라”고 부탁했다. 그가 혹시 편지를 전달해 주지 않을 까 걱정스러워 한마디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간 지 얼마 안 있어 담당 예심원이 달려 들어왔다. “야 민호, 이놈 새끼 나오라! 뭐 미안하니 기다려 달라고…… 넌 여기서 썩어져야 할 놈이야. 나가겠다고?! 누가 내보내 준대” 그는 이렇게 씨벌이며 내가 명철이에게 주었던 종이쪽지를 꺼내 들고 흔드는 것이다. 명철이 그 자식이 나가면서 내가 준 편지를 예심원에게 가져다 바친 것이다.

 

나는 명철이가 괘씸하기 그지 없었다. 감옥에 있을 때 밥 한 덩이라도 더 얻어 먹으려고 나에게 알랑거리면서 살이라도 떼어 줄 것처럼 하더니 나가면서 나를 죽이느라 고자질했던 것이다. 역시 ‘교활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활빵’이란 감옥생활을 겪은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교활해진 다는 소리다.

 

후날 감옥에서 나와 아내에게 물으니, 어떤 얼굴이 하얀 빡빡머리가 찾아 왔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게 그 편지를 꺼내면서 “남편이 이 편지를 보내더라. 내가 감옥에서 잘 돌봐주었다. 그가 나에게 솜옷을 가져오라고 하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명철이었다. 예심원이 그 편지를 나에게 보여주고 명철이에게 다시 줘서 우리 아내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알아보라고 한 것이다.

 

나에 대한 아내의 의중을 타진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감옥에 간 다음 예심원이 여러 번 우리 집에 찾아 왔다고 한다. 어떤 때는 밤 늦게 찾아와서는 술상을 차리라고 하면서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다고 한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는 “당신 남편운명은 내 손에 달려있어”라며 살리려면 뭘 좀 가져다 바치라는 소리다. 그러나 이미 나와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아내는 예심원의 요구를 뿌리쳤다고 한다. 

 

실패한 두 번의 자살기도, 끈질긴 목숨 붙들고

 

절망 속에 빠진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자살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내복을 벗어 올가미를 매고 뙈기 창문의 쇠창살에 묶을 준비를 했다. 21명이 갇힌 감방에는 자리가 너무 비좁았다. 새벽 1시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공기창에 밧줄을 맸다. 그리고 변기를 가리운 시멘트 벽에 올라갔다.

 

밧줄을 목에 매고 시멘트벽 아래로 내리뛰는 순간 ‘쿵’ 하는 소리가 났고 정신을 잃었다. 순간 감방 안에서는 “선생님, 민호가 목을 매 자살 시도를 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리고 우르르 죄수들이 일어나 몰려왔다. 간수는 철창 밖에서 “그 놈 새끼 끌어내려! 이놈의 새끼, 네 새끼 자살 시도해. 네 새끼 여기서 살아 나갈 것 같아?”라고 소리친다. 

 

첫 번째 자살시도에서 실패한 나는 다시 한번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내가 00시 감옥에 잡혀 있는 6개월 동안 단 3번 ‘햇빛 쪼이기’에 나갔다. 일명 ‘일광욕’이라고 하는 햇빛 쪼이기는 감옥일과에도 있는 규정이다. 그러나 간수들은 얼마나 비인간적인 놈들인지 죄수들이 감옥에서 죽든 살든 관계하지 않았다.

 

구류장에 한 달만 들어가 앉으면 살색이 하얗고 먹지 못해 창백해진다. 간염, 결핵, 폐렴 등 각종 질병이 침습해 폐인으로 변한다. 건강검진이고 없다. 이따금씩 시병원 구류장 담당 의사가 찾아 오지만 “어디 아픈데 없어?”라고 물어 볼뿐이다.

 

한번은 의사와 계호책임자가 불러 나갔다. “야, 민호 아픈데 없어?”라고 물어 “가슴이 아프고 간이 부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프면 안되지, 너야 아프면 안 되는 놈이니까”라고 빈정댄다. 죄가 크니 감옥에서 죽으라는 소리다.

 

오래간만에 밖에 나오니, 앞이 새하얗게 부시고 가슴이 탁 튀었다. 간수들은 외부 철창을 네 겹으로 둘러싸고 죄수들의 일거일동을 살폈다. 햇빛쪼이기 시간에는 전체 감방의 죄수들을 다 끌어낸다. 혹시 몰려 있는 시간에 연락이라도 할 가봐 경계하는 것이다. 누구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사정없이 뭇매를 안긴다. 나는 오래간만에 형제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서로 미안한 눈길로 위로를 했다. 어쩌다 이런 불행이 찾아왔을까, 어떻게 하든 죽지 말고 이 죽음의 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를 굳혀준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창문의 대못을 감춰가지고 들어왔다. 그거라도 삼켜 밸에 구멍이라도 뚫리면 병보석이라도 나가 밖에서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밤에 몰래 변기에 구부리고 앉아 꺼이 꺼이 삼켰지만, 배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죽지 않으려니 대못도 그냥 밸을 통과해 나간 것 같았다.

 

예심원의 유도심문에 걸려들다

 

하루는 예심원이 나를 불렀다. “민호, 오늘은 좋겠다. 너의 애를 보는 날이니…”그는 나를 몰고 가며 시물시물 웃었다. “자 이젠 사건 종결이다. 지장이나 찍고 너 색시가 가져다 준 밥이나 먹자”라고 얼린다. 근 석 달 만에 아내가 아이를 업고 감옥에 찾아왔다. 그새 아이는 몰라보게 컸다. 아이는 여전히 자기 앞에 서있는 빡빡머리가 누구인지 모른다.

 

“여보, 미안해”더 이상 말이 나가지 않았다. 아내는 나와 정면으로 보기를 거부하고 가지고 온 밥을 펴놓았다. 예심원은 “민호는 한 10년 먹고 오라,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지”라고 말하며 아내의 얼굴을 힐긋 바라본다. 남편이 10년 징역을 가니 옥바라지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눈치다. 아내는 “혼자 살아야죠.”이라고 짤막하게 말한다.

 

나는 그 말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도 얼마나 타격을 받았으면 그렇게 모진 마음을 먹고 나와 이혼을 결심했는지 이해한다. 모든 것은 예심원이 바라던 대로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예심원이 이례적으로 아내와 나를 대면시킨 것은 이왕 감옥에 가니, 옥바라지를 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보라는 소리다.

 

아내를 보내고 나는 예심원과 단둘이 마주했다. 죄수들은 예심원의 앞에서 무조건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한다. 예심원들은 죄수들의 돌발적인 공격에 대비해 항상 방 한구석에 몽둥이를 세워놓고 있다. 예심과정에 잘 토설하지 않으면 두들겨 팬다.

 

공개 처형될 줄 알았던 나는 징역 10년 소리에 희망을 가지고 부푼 마음에 들떠있었다. 무릎을 끓고 있는 나에게 예심원은 “민호, 폭약은 어디다 감췄지?”라고 묻는다. 나는 “폭약은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 “그럼, 총알은 어디에 건사했어”라고 말한다. 나는 얼결에 “그건 내가 건사 안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럼 누가 건사했어?”라고 캐묻는다. 아차! 나는 내가 실언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모른다”와 “건사 안 했다”는 엄연하게 틀리다. 후자는 분명 있었는데, 내가 출처를 모른다는 말로 들리는 것이다.

 

예심원의 유도질문에 걸려든 것이다. 나는 제발 그가 총알만은 사건화 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청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예심원은 병아리를 덮치는 독수리의 야수의 눈길이었다. 죽이려면 완전하게 철저하게 죽이려는 것이다.

 

교활한 예심원에 걸려 두벌 죽임을 당하다

 

훗날 예심원은 우리 부모를 불러 “총알을 내놓지 않으면, 집안 기둥뿌리를 뽑겠다. 이놈의 영감, 구류장에 앉고 싶어?”라며 호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물건을 어디서 내놓으라는 것인가?”라며 허탈해 했다는 것이다. 사실 예심원은 아버지까지 감옥에 넣으려고 작정을 했던 것 같다. 하도 아버지가 젊었을 때 국가를 위해 공을 많이 세웠기 때문에 감히 감옥까지 넣지는 못했다. 그러나 소위 법을 주무른다는 안전부의 교형리들은 우리 집을 완전히 반역자의 집안으로 매장해버리기 위해 악을 쓰고 덤벼들었다.

 

사실 나는 만약을 생각해 AK자동소총 탄알 9발을 건사해두고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군견대장으로부터 사냥용 탄환을 가지고 있던 나는 호기심에 몇 발을 땅에 묻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동생과 나뿐이었다. 나는 예심원과 갈라져 감옥에 들어와 통절히 나의 한 간의 실수를 통탄했다.

 

“범에 물려가더라도 정신만은 잃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정신을 차려야 할 순간에 실수가 나를 수천 길 구렁텅이에 빠뜨린 것이다. 나는 저 동생을 찾아 주의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을 맞춰야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내가 모든 죄를 쓰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간수가 없는 틈을 타서 3호에 있는 동생에게 “야, 민혁아, 거 알 있잖아, 절대로 모른다고 해”라고 말해버렸다. 이 말이 예심원의 귀에 안 들어간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모험을 해서라도 여기에서 총알사건을 막고 싶었다.

 

모든 것은 예심원의 타산에 척척 맞아 들었다. 예심원은 나를 들여보내고 밖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는 “민혁이 뽑아라”고 간수에게 호령했다.

간수는 동생을 뽑아 예심원에게 넘겼고, 민혁이는 약 3시간 가량 취조를 받고 구류장에 돌아왔다. 내가 땅에 묻은 총알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예심원은 득의 양양해서 나에게 쏘아붙인다. “야, 내가 너의 속안에 열두 번도 더 들어갔다 나왔어” 죄수들만 10년 넘게 다루어온 예심원은 죄수들의 속박감과 초조함을 환히 꿰뚫고 있었다.

 

과연 전문가답게 나를 유도 심문하는데 성공했고, 나의 반응을 살피고, 다음은 동생을 찾아 협박했던 것이다.

 

이때 나는 총알사건까지 나오면서 살 가망을 모두 잃어버렸다. 특히 총기사건, 총알사건은 1호 행사(김일성 김정일 행사)가 잦은 00시에서는 반역죄로 취급할 만큼 엄중한 것이다. 총알은 보관 그 자체도 처벌을 받는 사건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내가 법에 대해 왜 그렇게도 몰랐는가 하는 것을 통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통상 북한에서는 법전과 범죄유형에 대해 주민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있다. 주민은 오직 법의 탄압대상이 되는 것이다. 북한은 주민들에게 법전을 공개할 경우, 외부로 법전이 새어나가 공산독재의 처벌유형이 공개되는 것을 최대로 주의하고 있다.

 

주민들에게 ‘사회주의법무생활’이라는 일반 사회법질서를 준수할 데 대해 강조하지만, 민사소송, 형사소송과 관련한 법 유형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주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일단 죄를 범하고서야 죽을 범죄에 걸렸다는 것을 통절하게 된다.

 

죽음의 문턱- 도안전국에 이관되다

 

이렇게 시들어가던 중 1999년 6월이었다. 도안전국에서 내려왔다는 소좌(소령) 예심원이 내려왔다. 보통 중대범죄는 도 사건으로 취급되며 사형수는 도안전국이 맡게 된다. 지방에서 사람을 처형할 경우, 친인척관계로 엮어졌기 때문에 개인적인 복수를 무서워하는 것이다. 시 안전국 예심원이 우리의 문건을 다 만들어 놓고 다시 도 안전국에 의뢰하여 재심사하게 만든다.

 

그래야 시 예심원이 무사할 수 있다. 보통 예심원들은 한 사건이 끝나면, 특히 사형사건을 하나 끝내면 다른 지방으로 보낸다. 행방을 묘연하게 만드는 것이다.

 

갑자기 감방안에 무거운 분위기가 돌면서 “민호, 나와, 대가리 들라,”고 소리친다. 도에서 내려오자 구류장에서 비인간적인 학대행위를 하던 간수들도 죄수들에게 살갑게 굴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거쳐 마지막 확인작업이 끝나면 도 검찰소, 도 재판소 심의를 받는다. 그리고 판결을 받는다. 갈수록 절망에 넘치는 노정이다. 도안전국에 올라간다고 하니, 감방안의 죄수들은 “야, 도 안전국에 올라가면, 밥도 잘 주고, 교정도 세지 않대”라고 입방아를 찧는다. 죄수들에게 있어서 감옥을 옮기는 것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 잘난 감옥도 정이 들면 뜨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오래간만에 아버지가 감옥에 찾아왔다. 주름 덮인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왕년에 200여명을 거느렸던 당당했던 모습은 간데 없고, 내 눈앞에는 보통의 촌 늙은이가 되어 나타났다. 아버지는 “너희들이 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도 볼 겸 해서 왔다”고 말씀한다.

 

“아버지 정말 미안해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나는 속죄의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는 담배를 한가치 꺼내 들고 예심원에게 사정했다. “이 애들에게 담배 한대 줘도 되겠습니까?”그러자 예심원도 머리를 끄덕인다.

 

평소 아버지는 우리에게 담배를 절대 피우지 못하게 했다. 감옥생활 1년 동안 담배를 대보지 않아 피우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지만, 아버지는 감옥에 있으면 오죽이나 속이 아프겠는가를 타산해 주고 싶은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우리는 걱정 말라고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간 빨갱이 집안으로 간부로, 공을 세웠던 아버지의 공로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감옥에서 나오면 몇 배로 효성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