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문제로 北 압박해야, ‘핵 압박’ 주민 거부감 강해
베이징에서 진행된 5차 6자 회담 소식을 들으니, 북한 핵무기 폐기는 또다시 희미한 안개 속에 파묻혀 앞이 보이지 않는다.
북핵은 남한과 해외에 떠도는 수십만 탈북자들의 운명과 직접적인 연관관계에 있다. 핵 문제가 바로 해결되고 북한이 개혁 개방돼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 탈북자들의 운명이다. 때문에 핵문제가 바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93년 1차 핵 위기 때로부터 14년이 흘렀다. 그때도 김정일의 전술에 미국이 놀아났지만, 이번에도 5차 6자 회담 3단계회의에서 발표된 ‘공동문건’은 우리의 염원을 확실히 외면했다. 김정일의 전술에 넘어가 헤매고 있는 남한 좌파들과 미국 등 유관국가들의 판단을 보면 역시 통일이란 요원한 장래의 일이구나 하는 허탈감이 밀려온다.
북한 핵문제를 1:1로 맞붙어 무력으로 풀어보겠다는 것은 무리수가 뒤따른다. 핵은 김정일 정권과 그 수하 측근들이 구세주로 여길 만큼 품과 공이 든 ‘3대독자 외아들’과 같다. 가령 예를 들어 3대를 내려오면서 겨우 본 외아들을 이웃집이 “그 애를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켜라” 혹은 “이웃에 재앙이 되니 그 애를 버려라”하고 말하면 순순히 들어줄 집안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핵을 무력과 봉쇄로 빼앗겠다고 하는 것은 북한주민들까지 덩달아 거부감을 촉발시킬 뿐이다. 때문에 북한문제는 김정일정권의 반인륜적인 인권을 문제 삼아 불법 위조지폐, 마약밀거래와 같은 국제범죄로 압력을 가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북한주민들도 얼마든지 공조를 불러낼 수 있는 사안이다. 북한인민에게 가해지는 거주이전의 자유, 여행의 자유, 식량배급제에 의한 굶주림, 10년 이상의 군복무, 직장이동의 자유 등 초보적인 반 인륜적 문제를 꺼내 들어 그들 스스로가 공감을 표시하도록 해야 한다.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자신들의 삶을 통절히 비탄하고 당국에 속아온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범 국민적인 투쟁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인권문제를 논할 때 얼마든지 김정일정권을 압박할 수 있는 문제들이 많다. 앞서 나온 사람들에 의해 북한 정치범 수용소문제가 북한의 인권상황을 세계에 알리는 촉매제로 사용되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일반 수용소의 참담한 상황이 매몰되어 있다.
지금 북한에서는 민주주의 국가의 일반 범죄자들의 상황에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죄수들은 삶의 권리가 없으며 그들은 지금도 죽음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다.
현재 북한의 교화소에는 20만 명에 달하는 생계 형 범죄자들이 수용되어 있다. 그들은 현재 죽음의 사각지대에서 목마르게 남한, 또는 국제사회의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검질긴 목숨을 끊지 못하고 며칠씩 단식하고, 못과 모래를 한줌씩 삼켰다가도 생의 욕구 때문에 다시 죽음을 포기하고 있다.
이 지옥 같은 생활을 겪어본 나는 오늘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의 생활을 누리면서 북한의 인권에 대해 선량한 양심 앞에 호소하고자 글을 쓴다. 대한민국에 입국한지 4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슬픈 사연을 안고 지나온 10여 년 전을 돌이켜 본다.
방심했던 운명의 30분, ‘지옥 행’ 시작
1998년 12월 20일은 내가 평안남도 00시 안전부에 체포된 날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쌀쌀한 기운이 옷깃에 스며든다. 결혼 2년 만에 겨우 단칸짜리 집을 장만하고 아내와 1살짜리 아들애와 살림을 차린 나는 시골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 뵙기 위해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저녁 7시가 지나자, 정전이 된 온 도시는 캄캄해졌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리어카를 끌던 장사꾼들의 움직임도 뜸해졌다.
바람 부는 대동강 대교를 지나 집에 도착하니, 집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다린다. 죽으로 대충 끼니를 때운 우리 가족은 방바닥에 널어놓은 옥수수를 뜯고 있었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가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대문에 달아 놓은 방울이 울리면서 “민호야, 민호 있니?” 라고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요” 하고 문을 여니 이웃집 성수의 아내와 그의 어머니가 서있었다. “방금 우리 집에 안전부 수사과 지도원들이 왔었는데, ‘성수가 어디 있어?’라고 묻더라”고 말한다.
“그래요? 무슨 일로요?” 조바심이 난 나는 이렇게 다그쳐 물었다. “글쎄 나도 몰라. 아무튼 사태가 심상치 않다”며 그들 모녀는 다급히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상황이 불리하니 빨리 피하라는 암시와 같이 들렸다.
그들 모녀가 떠나간 후, 나는 동생과 마주 앉아 아무 말없이 서있었다. 성수와 함께 한 주일 전 농장 탈곡장에 갔던 일이 생각났다. 혹시 안전부 수사과에서 냄새를 맡고 수사에 착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예감이 들었다.
한 30분 지났을까, 우리 집 대문을 다급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동생이 나가 대문을 열었다. 밖에서 “여기가 민혁이네 집이 맞소?”라는 소리가 들린다. 불 꺼진 창문에서 밖을 응시하던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복차림의 사나이 두 명이 대문을 밀고 들어 오는 것이다.
그들은 초롱불이 가물거리는 방안에 들어서더니 “당신이 하민호인가?”라고 물으며 나의 표정을 살핀다. 나는 얼른 태연해지려고 했으나, 그들은 순간 나의 눈에 비낀 긴장을 포착했다.
“맞는데요” 나는 꺽 막히는 듯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안전부 수사과에서 왔다. 확인할 것이 있는데, 좀 같이 가자”며 나와 동생을 에워싼다.
순간, 30분전에 성수의 아내가 와서 사태가 불길하다고 알려주었을 때 자리를 피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되는지 몰랐다. 그 행운의 30분을 놓친 탓에 나는 17개월간 시안전부 구류장과 도 안전국 구류장을 전전하며 죽음의 지옥을 헤맸다.
수사과에서 겪은 1차 고문, 버티자던 ‘무언의 약속’ 산산 조각나
수사원들의 호송 하에 성천강 대교를 건너며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절대로 불지 말고 끝까지 지키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수사원들의 의중을 타진하기 위해 이말 저말 말을 시켜 보았다. 그들은 우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내가 다니는 직장에 대해 물어볼 뿐, 왜 우리가 가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칼칼한 목소리에서 우리가 단순히 조사차원에서 가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시 안전부 정문에 들어서자 그들은 태도는 달라졌다. 낯 있은 시 안전부 정문이며, 교환실, 감찰과 사무실을 지나 수사과 사무실에 들어서자, 둥근 석탄 난로를 둘러싸고 수십 명의 수사원들이 진을 치고 서있었다.
“야, 이 애들을 따로 갈라놓으라”는 수사과 과장의 호령이 떨어지고, 옆방에서 ‘악, 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술을 받아 내느라고 장작개비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소리였다.
소좌(소령)의 견장을 단 수사과장은 “민호, 너 여기 왜 왔는지 알지?”라고 묻는다.
“잘 모르는데요” 라는 소리에 불현듯 “야 이놈의 새끼야, 너 시치미 떼갔어” 라며 불이 번쩍 나게 주먹이 날라왔다. 앞이 새까매지면서 비칠거리던 나는 “야, 이 새끼들아, 너 때렸어, 너희들 인권유린이야”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야, 이 새끼, 인권유린을 다 알고, 보통새끼 아니로구나” 수사원 두 명은 장작을 들고 사정없이 두드린다. 얼굴에 피 멍이 든 나는 만신창이 되어 바닥에 스러졌다. 수사과장은 득의 만면한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내 머리를 장작개비로 두드리며 비웃었다.
“야, 민호 너 머저리로구나, 너희 패들이 다 잡혀 들어왔어, 네가 아무리 뻗대야 소용없어, 너 하나 죽는 길이야”라며, 옆의 수사원에게 “애들 방 준비됐어?”라고 묻는다.
옆의 수사원이 “예, 방금 계호에서 연락이 왔는데, 빈자리가 있답니다.”라고 보고한다. 이어 “데리고 가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두 명의 수사원이 내 손에 수갑을 채우고 수사과를 내려와 안전부 뒤뜰로 끌고 갔다.
계호(간수)들에게 당한 2차 폭행
나는 속으로 창피하고 억울하고 착잡한 마음을 안고 그들에게 끌려갔다. 도달한 곳은 다름아닌 시 안전부 구류장이다. 그 구류장은 내가 과거 친했던 계호(간수)원들과 어울려 몇 번 다녀왔던 곳이다. 구류장 대기실에는 소위 연장을 단 계호책임자 명철이와 특무상사와 하사, 중사 연장을 단 낯 있은 계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수사과 지도원은 그들을 향해 “애를 좀 잘 돌봐주라”고 지시했다.
계호 책임자는 과거 나와 안면이 있던 사람이다. 시멘트 공장 초급당비서인 아버지 덕에 안전부 정치학교 6개월 과정을 마치고 책임자가 된 그는 평소 교활하고 야비하기로 소문난 놈이었다.
그는 둘러싸인 계호원들을 향해 “야, 이 새끼 네가 어떻게 하다 이런데 다 왔어, 이애 검신(몸 검사)부터 하라”고 소리친다. 우르르 개떼 같이 달려든 계호들이 내 옷을 벗기려고 했다. 윗도리와 바지까지 벗기운 나는 팬티만 남겨두고 창피해 머뭇거렸다.
순간 젊은 하사관 계호의 구두 발이 나의 가슴을 가격했다. “이놈의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버텨”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구두 발 공세를 가했다. 두세 놈이 달려들어 적수공권의 나를 짓밟았다. 나는 방 모서리에 쪼그리고 앉아 매를 맞았다.
순간 나체의 몸에 매까지 맞은 나는 분통이 터지고, 짐승취급을 당하는 모멸감에 머리를 들지 못했다. 계호책임자의 명령에 따라 계호원들은 나를 짐승처럼 끌고 3호 감방에 처넣었다. 구류장에 들어서는 순간, 구역질 나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인내, 똥내, 지린내가 범벅이 된 구류장 환경은 나에게 도저히 낯선 세계였다.
구류장에서 맞은 3번째 구타
3호 감방에 들어서자, 잠자리에 누웠던 죄수들이 일제히 일어나 앉았다. 철창 밖에서 영수라는 계호가 머리를 끄덕이며 감방 ‘떡봉이’를 불렀다. “야, 이빠디, 이 새끼 정신 좀 차리게 해주라”고 소리친다. 이빠디는 이빨을 가리키는 북한 사투리다. 사람을 죽이고 들어왔다는 이빠디는 별명 그대로 포악한 놈이었다.
순간 감방 뒤편에 앉아 있던 이빠디가 날아들어오며 나의 가슴을 들이 찼다. 숨이 막히는 듯한 전율을 느끼며 그 자리에 스러졌다. 순간 까딱없이 앉아 있던 15명의 죄수들이 달려들었다. 앞이 안보이고 숨이 막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이놈들이 오늘 뿌리를 뽑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구류장에 처음 들어오는 죄수들이 거쳐야 하는 일종의 교정이다. 공화국 법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맛보게 하는 곳이고, 초자들의 당당한 기세를 꺾기 위한 것이다.
죄수들은 “그만두라”는 계호의 명령에 따라 제 자리에 와당탕 들어앉았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죄수들의 모양을 보는 순간 나는 깜작 놀랐다. 빤빤하게 머리를 깎은 피골이 상접한 죄수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 머리 깎은 죄수들이 옆을 스쳐도 이상하게 살펴보던 나는 드디어 나도 이런 세계에 끌려왔다고 생각하니 원통했다. 나는 제일 맨 앞자리에 물러 앉아 모포 한 장 없이 쪼그리고 누웠다. 너무 추워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
눈앞에는 근심하고 있을 아내와 한 살짜리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감옥에 끌려온걸 그가 알면 얼마나 놀랄까, 나는 쓰린 가슴을 쓸어 내리며 뒤척이다가 감방 앞으로 벌렁 벌렁 기어나갔다.
“간수님, 물을 좀 주시오” 라고 소리치자, 뒤에서 다시 주먹이 날라왔다. “야 이 새끼야, 어디라고 간수야, 선생님이라고 불러라.” 이빠디는 초범인 나를 계속 괴롭히며 계호들에게 알랑거리기 시작했다.
계호는 “야, 민호 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정신이 아직 덜 들었구나”며 큰 사발에 물을 찰랑대게 하나 떠왔다. 무려 3차에 거쳐 구타를 당한 나는 몹시 갈증이 났던 차에 그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계호는 다시 한 사발을 떠가지고 왔다. “마셔!”그는 또 재촉했다. 나는 단숨에 마시기 어려워 두 번 꺾어 다 마셨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 사발을 떠왔다.
내가 입을 떼지 않고 한 사발을 다 마실 때까지 그냥 날라왔다. 무려 다섯 사발을 다 마신 후에야 계호는 “들어가라”고 호령한다. 삽시에 주린 배에 물만 가득 채운 나는 어기적 거리며 앞 자리에 돌아왔다.
5시부터 시작된 구류장 일과 생활
새벽 5시쯤 되었을까, 한 겨울의 5시는 날이 밝지 않은 캄캄한 밤이었다. 기상! 돼지 멱따는 소리와 같은 고함소리가 고막을 때리며 울린다. 와당탕 하고 일어난 우리는 모포를 갤 사이도 없이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계호들은 먼지 자욱한 구류장을 한 바퀴 돈 다음 “정돈하라”고 호령한다. 여기저기서 부스럭 대며 죄수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철창에 한 사람씩 나가 “선생님, 3호 감방 00 소변보게 허락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라”는 호령이 떨어져야 소변을 본다. 만약 소변을 보겠다고 말하고 똥을 싸면 대번에 알린다. 수세식이 아닌 구류장 변기에서 똥 냄새가 감방에 퍼져 계호원의 코를 찌르기만 하면 대번에 알기 때문이다.
코가 밝은 계호들은 “어떤 놈이 똥을 쌌구나, 밝혀내 보고하라”고 소리치면 감방장들은 앞다투어 “선생님, 0호 감방 00놈이 선생님 승인 없이 똥을 쌌습니다”고 고발한다. 간수들에게 잘 보여야 밥이라도 한 덩이 더 얻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떡봉이들은 역겨울 만큼 아첨했다.
물이 나오지 않는 변기를 마주하고 앉은 나는 도대체 우리 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옆 감방에 있어도 이름을 불러볼 수도 없다. 계호가 없는 틈에 말을 해도 그대로 고발한다. 나는 감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강구며 하나 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1호에 성수가 잡혀 들어가고, 2호에 둘째 형인 민규, 3호에 내가 감금되고, 4호에는 동생이 들어가고 6호에는 맏형이 잡혀 들어갔다. 2호에는 우리와 같이 공모했던 정철이가 잡혀 들어왔다. 한 사람도 빠지지 못하고 둥지째 잡혀 들어왔던 것이다.
그 동안 무서운 것 없이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왔던 우리형제는 다 죽어가는 독재의 법을 우습게 여기고 무방비 했던 나머지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것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농장 탈곡장에 들어가 옥수수 300kg을 훔쳐 먹은 것이 죄었다.
우리들의 죄는 단순 범죄가 아니라 집단 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반 체제 조직으로 낙인 되어 엄격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시안전부 수사과는 지금까지 해명하지 못한 집단 범죄를 우리와 연관 지어 뒤집어 쓰기 위해 여죄 캐기에 주력했다.
“이방에 몇 마리냐?” 수인 짐승취급 당해
아침밥은 7시 반에 먹는다. 구류장 한 켠 벽에 뚫린 개구멍 같은 곳에서 “식사 냅시다”는 구류장 식모의 목소리가 들린 지, 30분이 지나도록 계호는 까딱하지 않고 구류장 안을 응시했다.
계호는 발로 식사 밀차를 걷어차며 6호 감방부터 차례로 왔다. 덜렁거리는 밀차에 실린 밥그릇에서 풍기는 구수한 냄새는 죄수들의 주린 창자를 사정없이 뒤집어 놓았다. 알미늄 식기에 통 강냉이 50알 가량이 맹물에 퉁퉁 불려져 있었다. 죄수들은 좌우 두 줄로 머리를 마주하고 앉아 밀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생김새가 뱁새 같은 영수라는 계호는 떡봉이에게 “야, 여기 몇 마리야?”라고 묻는다. 이빠디는 “예, 16마리 입니다. 어제저녁에 한마리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야, 17개 내리라, 너 하나 더 처먹으라”고 명령했다. 이빠디는 “고맙습니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처음 밥그릇을 받아 든 나는 구역질이 났다. 과연 이런걸 먹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나는 한 숟가락 입에 넣었다가 다시 뱉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죄수들은 저마다 내 눈을 맞추느라 힐끔거린다. 안 먹을 바에는 자기에게 줬으면 하며 은근히 바래는 눈치였다.
나는 오히려 얌전하게 앉아 있는 죄수의 밥그릇에 덮어주었다. 그러자 힘이 있는 죄수들은 눈을 부라리며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밥 시간이 끝나자, “정돈하라”는 계호의 호령이 울리고, 온 감방이 물을 뿌린 듯 조용했다.
시안전부 구류장에는 여자감방이 2개, 남자 감방 5개, 이렇게 모두 7개 감방이 있었다. 한 개 감방은 너비 2m, 길이 5m에 15~20명씩 수감되어 약 100여명의 죄수들이 잡혀 있었다. 감방앞면은 철창으로 전면을 대고, 뒤쪽에는 너비, 길이 0.5m의 뙤창문이 있었다.
감방 안의 더러운 공기를 밖으로 배출할만한 공기창이라곤 그것이 유일하다. 그 창문으로 중앙방송이 간간히 들려와 바깥세상의 정보를 전해주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하루 종일 올 방자를 틀고 앉아, 까닥 움직이면 모두매
감방 안에는 살인을 한 사람, 강도, 절도, 사기, 금 장사, 등 각종 범죄자들이 있었다. 그 속에는 고질적인 상습범들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먹을 것이 없어 농장 밭이나, 탈곡 장에서 곡물을 훔치다가 잡혀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감방 규정은 오전 오후 10분간의 휴식시간을 빼고, 거의 모든 시간을 정좌로 앉아 움직일 수가 없다. 일단 교정에 들어가면 온 감방은 조용하고, 3시간 이상을 버텨야 한다. 만약 이나 벼룩이가 잔등에 올라 가려워 긁으면 뒤에 앉아 있던 이빠디가 달려들어 몸을 푼다. 똑바로 앉아 있는 죄수의 머리를 발로 까서 그 자리에서 쓰러뜨리는 일은 다반사다.
떡봉이들은 자기들의 저려오는 근육을 풀기 위해 한대로 마치지 않는다. 그러면 계호들은 입가에 만족을 표시하고 안을 응시한다. 다른 하나의 처벌방법은 소리가 나는 방 전체에 기합을 주는 방법이다. 손을 하늘로 올리고 500번씩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뽐프’라고 하는 기합을 준다.
가뜩이나 먹지 못한 죄수들이 ‘뽐프’ 50개만 하면 기운이 떨어져 아랫도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위로 폈던 팔을 점점 내려와 머리에 붙이거나, 깍지를 끼는 날에는 계호가 지켜보다가 횟수를 배로 늘린다. 그리고 다른 감방들을 하나하나씩 취소시키는 방법으로 죄수들에게 고통을 준다.
참지 못한 죄수들은 “선생님, 잘못 했습니다.”라며 애원한다. 그러나 계호의 중지명령은 떨어지지 않는다. 악착 하기 이를 데 없는 계호들의 교정(고문)방법도 전과 많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비인간적인 학대를 했지만, 지금은 자기들이 손 대는 것을 피하고 감방안의 죄수들끼리 싸우도록 조정하고 있다.
감방 안의 타살 사건, 간수들 고문방법 교활해져
한 계호가 죄수를 때려 죽인 사건이 발생한 이후 계호들은 상처 없는 기합을 주는 한편 자기들이 직접 때리지 않는다. 자기들이 때리다 죽으면 제기되기 때문에 죄수들이 싸우다가 죽었다고 보고하면 되기 때문이다.
성철이라는 계호는 한 죄수가 밖에 면회 갔다가 들어오면서 옥수수 빵 두 개를 감춰가지고 들어오자 검사도중 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죄수를 끓어 앉히고, 구두발로 옆구리를 걷어차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죄수들은 한번 잘못 다쳐도 죽을 수 있다. 이 계호원이 그것을 타산하지 못하고 손을 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처음 스러진 죄수가 일어나지 않자, 이 계호는 꾀병을 부린다며 그를 세면장에 끌어다 찬물을 들부었다. 그래도 인기척이 없자, 그의 맥을 짚어 보았다. 사늘하게 식은 그의 손목에서 손을 뗀 그는 거적에 말아 그날 저녁 어디론가 가져다 버렸다.
며칠 후 면회 온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보이지 않자, 울며 불며 구류장 밖에서 통곡했다. 당시 이 사건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철이의 잔악성에 대해 알고 있는 다른 죄수들이 출소한 후, 중앙에 신소를 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인권문제를 떠들자, 전국적으로 안전부 구류장에서 죄수들을 구타하지 말데 대해 지시가 내려왔다. 일부 계호들이 신체적 구타를 가하는 경우가 적어졌지만, 악질적인 계호들은 여전히 고통적인 고문을 이어간다.
불지 않으면 철창밖에 손을 내밀게 하고 손가락 사이에 권총 소재대를 끼우고 발로 내려 치는가 하면 철창에 족쇄로 손을 묶어놓고 구두발로 들이 찬다. 손가락이 부셔져 달아나는듯한 고통과 비명소리는 온 감방을 처량하게 뒤집어 놓는다.
또한 주먹을 쥐게 하고 철창 밖 바닥에 대게 한다. 그리고 징 박은 구두발로 내려친다. 북한 안전부에도 소가죽과 돼지가죽이 없어 군화를 내주지 않는다. 그러면 안전원들은 폐타이어를 잘라 신발 뒤축에 대고 못으로 고정시켜 신는다.
그 징 박은 못이 손에 자국을 내면 상처가 붓기 시작한다. 감방안의 비 위생적인 환경에서 상처가 독을 쓰기 시작하면 온밤 비명소리를 내다가 파상풍병에 걸려 결국은 생명을 잃게 된다. 이렇게 죽은 죄수들이 하루에 한 명 가량 된다.
계호원들이 죄수들을 데리고 병원에 나가곤 하지만, 열악한 북한 병원에서 그들을 구원하기란 역부족이다. 굶주려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들과 매맞아 죽는 사람들이 차 넘친다. 그래도 그들을 석방시키지 않는다. 나가서 죽을 바에는 감방에 있다 편안히 죽으라는 소리다. 또 나가면 갈 데가 없어 또 도둑질하다 들어온다는 것이다.
내가 있던 갇혀 있던 6개월간 우리 감방에서도 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 죽은 사람이 있으면 제일 앞쪽에 끌어다 놓고 모포를 뒤집어 씌우고 아파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밥을 타먹는다. 송장냄새가 좀 날만 하면 “선생님, 00가 움직이지 않습니다”고 보고한다. 그러면 계호책임자가 나타나 손 맥을 짚어보고 밤 11시쯤 되면 덩치가 큰 죄수에게 시켜 그를 모포에 말아 어디론가 날라간다.
시체를 메고 나갔던 애가 한참 후에 돌아와 “어디 갔댔냐?”고 물으니, “병원 사체 실에 가져다 버렸다”고 말했다. (다음 호에 계속)
하민호(가명)/ 2003년 입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