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90년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고난의 행군’
90년대 중반 북녘 땅을 휩쓴 대 아사는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 옆집에서 살던 영남이네 가족도 신의주인가, 평북도 앞바다 어디인가 조개잡이를 떠났다며 집은 텅텅 비어있었고, 한적하게 떨어져나간 창문유리 사이로 먼지가 가득한 집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리에 나가면 장마당에 삼삼오오 떼를 지은 꽃제비들이 진흙탕에 묻힌 밥알을 주어먹느라 여념이 없었다. 언제 이발을 했는지, 까칠한 사내애가 한 어린 계집애를 데리고 거리를 헤맨다.
함흥 기계공장 정문 보일러 칸에서도 간밤에 두 명이나 굶어 죽었다고 한다. 길거리 퇴적 장에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흑인 같은 몰골을 한 40대의 중년남자가 허리 등에 붙은 주린 배를 그러안고 스러져 있다.
한때 죽음에 대해 끔직하게 생각하며 앞으로 나도 죽으면 묻힐 생각에 아찔했던 어제 날의 내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을 하도 많이 본 내 생각에 죽음의 공포는 이제 다 사라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무조건 살아남는 자가 영자(승리자)다. 이 말은 당시 북녘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삶의 투지였고 각오였다.
어머니는 오늘 아침에 책을 한 짐 지고 장마당에 나가셨다. 아버님께서 기계공장 기술준비실 기사로 있으면서 보던 손때 뭍은 책이다. 나의 아버지는 95년 공장에서 배급을 주지 않자, 석탄을 지고 신의주에 팔러 다니시다가 노상에서 굶어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라고는 공장에서 일 잘해 받은 국기훈장 3급과 공로메달이 담긴 훈장통과 과거에 공부하면서 보던 책밖에 없었다.
이불등과 이불장, 찬장과 알루미늄그릇 등 돈 될만한 물건은 다 들고 나가 팔았지만, 돈은커녕 입에 풀칠하기 조차 어려웠다. 이제 남은 물건이라고는 아버지가 보던 기술서적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도 나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책을 사볼 리 없었다. 공부깨나 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학생들도 기술서적 따위에는 곁눈질도 팔지 않았다. 혹 책을 사가는 사람들은 떡 장사꾼들이었는데, 떡을 사는 사람들에게 싸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책 한 권에 떡 한 개 값이 고작이었다.
무게가 3kg이나 실히 되는 ‘조선말 대사전’도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에 가야 볼 수 있을 만큼 구하기 힘든 책이었지만, 강냉이 5kg를 받고 팔고 말았다. 유치원 교양원을 하시던 어머니의 항상 밝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장마당에서 쓸쓸히 돌아오는 어머니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엄마, 나 중국 가서 딱 일년만 벌고 올게’
죽 물 한 그릇씩 거른 우리식구는 전기불도 없는 캄캄한 방에 누워 아무 말도 없었다. ‘호~ 우째 살꼬’ 그늘진 어머니의 한 숨소리는 우리의 어린 가슴을 한없이 허비어놓는다. 정말 내일 당장 가마에 넣을 쌀이 없는데, 우리식구도 영남이네 식구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졸지에 굶어 죽을 것만 같았다.
“엄마, 뒷집 창남이네 있지, 중국에 친척이 있다는데, 잘산대” 라고 내가 어머니의 귀속에 대고 말하자 “아서라, 그깟 중국이 잘 살면 너 한데 떡을 준다 더냐,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안전부에서 잡아간다”며 어머니는 내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그래도 엄마, 우리 혜산에 가서 중국사람 집 일이나 해주고 돈이나 좀 벌자” 나는 어머니에게 조르고 또 졸랐다. 철없는 나이도 아닌 16살의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어머니도 무슨 뾰족한 수가 있었으랴 만 그래도 기대 반, 실망 반으로 혜산으로 향했다.
그때가 97년 3월이었다. 혜산역에서 내려 역전 장마당을 돌아보는데 혜산 장마당은 함흥 장마당보다 중국물건이 많고 가격도 쌌다. 돼지고기, 쌀, 중국소시지, 중국 과자, 사탕, 신발 등 내가 가지고 싶었던 물건들은 다 있었다. ‘우리도 언제면 사람답게 입고 쓰고 먹어볼까’ 어머니와 나는 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눈요기로 물건을 돌아보며 궁상만 털었다.
이때 장마당 한쪽에서 젊은 여인 두 명이 쑤군거리며 우리 쪽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본고장 사람이 아니고 외지사람냄새가 나는지 우리를 보며 “아재(아주머니)! 어디서 왔소?”라고 묻는다.
함흥에서 왔다고 말하자, “저쪽 가자 구요?”라며 강 건너 쪽을 눈짓한다. 우리모녀가 저쪽이라는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의아해 하자 “중국말이요”라고 귀띔한다.
“아니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구먼……” 우리가 대뜸 난색을 표시하자, 그 중 한 젊은 여인은 “에구, 넌 정말 곱구나(이쁘다). 저쪽 가서 식당일만해도 한 달에 중국 돈 천원은 벌 수 있는데……”라며 혀를 찬다.
순간 나는 귀가 번쩍했다. 중국 돈 천원이면 우리나라(북한)돈 2만 5천원인데, 돼지 3마리 값이다. 일년만 고생하면 돼지 30마리 값, 그 돈으로 밑천을 잡아 장사하면, 우리는 함흥에서 째포(북송 귀국자) 못지않은 부자가 될 것 같았다.
그 여인들과 헤어져 걸어가는 내 머릿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떠날 줄 몰랐다. 문득 나는 어머니를 붙잡고 말했다. “엄마, 나 중국갈래. 딱 일년만 벌어가지고 올래.” 내 말을 들은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면서 “중국은 자본주의가 되어 여자들을 술집에 막 팔아먹는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고 단 마디로 내 요구를 일축해버렸다.
“엄마, 굶어 죽는 것 보다는 낫지 않나요. 저 아지미가 다 소개를 해준다니까, 내가 잘못되면 저 아지미한데 책임을 물으면 될게 아니요?” 끈질긴 내 요구는 어머니의 승낙을 기어코 받아내고야 말았다.
3남매의 둘째인 나는 어릴 적부터 고집이 세어 어머니도 내 말만은 꺾지 못했다. 장마당 모퉁이로 다시 찾아간 나는 그 아지미들을 찾았다. 아지미와 약속한 후 나는 그날 밤으로 압록강을 넘을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을 이사하지 말고 기다릴 것을 약속했다.
40대의 아저씨에게 팔려가다
나와 함께 압록강을 넘은 일행은 강원도에서 온 아줌마와 북청에서 온 여자 2명, 이렇게 모두 네 명이었다. 그 가운데 내가 제일 어렸고, 모두 20~30대 여성들이었다. 우리는 허리를 치는 강물을 건너 장백현에 들어섰다.
캄캄한 밤이어서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우리를 안내한 여자는 강 건너편의 깜박이는 전지불을 곧바로 잘 찾아갔다. 우리를 마중한 사람은 30대의 중년 남자 2명이었다. 그들은 길안내자와 중국말로 뭐라고 쑤군거리더니, 우리에게 한국말로 “잘 건너왔다”며 가자고 했다.
안내했던 여자는 우리들에게 이 사람들을 따라가면 식당을 소개해줄 거라며, 그날 밤으로 압록강을 되돌아 건너갔다. 우리는 중국사람들이 안내하는 대로 중국집에 들어갔다. 중국남자는 여러 곳에 전화를 치며 큰 웃음을 지으며 아주 기뻐한다.
일행은 그 집에서 사흘 밤 나흘째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소식이 없자, 우릴 언제 식당으로 데려가는 가고 물었다. 그 중국사람은 “여기에 몰려 있으면 중국공안이 잡으러 오니,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중국말만 하니 우리는 아무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닷새째 날 드디어 우리의 운명을 가르는 시각은 왔다. 건장한 중국청년들이 두 세 명씩 짝을 지어 오더니 한 사람씩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압록강을 함께 넘은 그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나는 자동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그들이 가자는 대로 이끌려 갔다. 중국말과 글을 한자도 모르는 벙어리마냥 그들이 가자는 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훗날 알고 보니, 내가 간 곳은 중국 산둥성(山東省)이었다.
내가 살 집이라며 안내하는 집에 들어가보니, 수염이 시커먼 40대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나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수군거리더니 헤어졌고, 그제서야 나는 내가 일할 곳이 식당이 아니라 ‘시집’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통이 터졌다.
아직 남자라고는 알지도 못하는 10대의 어린 몸에 40대의 아저씨가 결혼 상대라니, 아무리 거지 나라에서 왔다고 해도 나의 정조만은 짓밟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몸부림치고 울며 그 중국아저씨에게 엄마한테 돌려보내달라고 사정했다.
아저씨는 말이 통하지 않자, 무엇인가 자꾸 사정하듯 이야기 했고, 두 팔을 벌려 보이며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남자는 돈을 주고 너를 사왔으니, 이제는 자기 것이라는 것, 가겠으면 그 돈을 다 갚아내라는 손짓이었다.
사흘 밤 나흘 낮을 먹지 않고 단식하며, 방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엉엉 울었다. 눈은 퉁퉁 붓고, 몸은 바싹 여의었다. 중국남자는 밖에 나갈 때는 밖으로 문을 잠그고 일 나갔고, 돌아와서는 내 앞에 미음을 쒀놓고 혼자 담배만 뻑뻑 빨았다.
보아하니 난폭한 아저씨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일단 마음을 다잡고, 우선 살자, 그 다음에 도망을 치든, 돈을 벌든 해야 어머니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의 문을 열었다. 우선 중국말부터 배워야 했다. 그래야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중국아저씨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고 밥도 먹었다. 그 과정에 중국말도 얼마간 익히게 되었고, 중국생활 2년째 되는 해에 딸도 낳았다. 아무리 중국남자가 음식을 맛있게 해주고, 아껴주어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항상 머릿속에는 어머니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죽어도 한국으로, 자유를 찾아
나의 딸은 나를 닮아서인지, 예쁘게 무럭무럭 자랐다.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아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잘못 만나 내가 너를 끝까지 지켜줄지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을 남기고 언제인가는 떠나야 하는 몸이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달려 호적(戶籍)에 올렸지만, 나는 호적에 등재할 수 없었다. 중국공민이 아니기 때문에 공안국에서 호구(戶口)에 올려주지 않았다.
2003년 여름 나는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간 중국말도 배웠고, 한국방송을 듣는 과정에 나 같은 북한사람들은 한국에 가야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어머니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중국인 남편에게 “나는 아무래도 한국에 가야 하겠다. 그래야 어머니도 만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중국인 남편은 처음에 사정하더니, 나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던지 아이만은 남겨놓으라며, 어디 가든 소식을 전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나이 많게 장가를 가지 못하고, 나를 돈으로 구입해 남자구실을 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선량한 사람이었다. 진정 고맙기도 한 사람이다.
심양에 도착한 나는 우선 한국루트를 찾기 위해 취직을 했다. 선양 시타제(西塔街)의 미장원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면서 한국교회를 찾아갔다. 교회에서 만난 목사님을 통해 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기로 했다. 비교적 한국 행은 나에게 쉽게 찾아오는 듯 했다.
내가 집을 나선지 두 달 만에 한국행을 희망하는 5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중국 쿤밍(昆明)을 향해 떠났다. 가짜 신분증을 소지하고 중국공안의 눈을 피해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중국남방지역까지 내려갔다.
쿤밍을 떠나 다시 라오스 국경까지, 우리는 낮에는 개인 집에서 자고 밤에만 걸었다. 초소를 에돌고, 정글을 헤치며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이곳은 중국으로 유입되는 마약들이 모이는 ‘황금의 삼각주’로 소문난 곳으로 특별히 단속이 심했다.
산골마다 중국공안의 잠복초가 있어 잘못 들어섰다가는 마약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되게 된다. 다행히 우리는 메콩강까지 도착하는데 성공했고, 태국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갔다.
긴 여정을 떠나 나는 어머니와 헤어진 지, 꼭 6년 만에 낯선 조국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탈북자들이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온갖 편의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직업학교를 다니고, 교회도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해보았다.
그러나 마음속 한구석에는 고향생각, 지금도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며 속이 재가됐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도무지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중국에 두고 온 딸애 생각이 눈에 밟혀왔다. 조잘거리며 한참 재롱을 부릴 애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이를 한국에 데려오자면 중국호적에 올라있어 부득이 입양하는 방법으로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제 딸이라고 해도 국경의 장벽은 나와 애를 친 혈육이 아닌, 남남으로 만들었고, 나는 양부모의 자격으로 그 애를 데려와야 한다.
정착 1년 동안 나는 몹시 방황했다. 속이 상해 술을 마시고 울기도 했고, 고향에 연락을 보낸 사람들로부터 어머니의 소식만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던 2005년 9월 어머니와 남동생, 그리고 언니가 압록강을 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나는 당장 날아서라도 중국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국경을 넘었으니 어머니와 만나고 그들을 꼭 대한민국 자유의 땅으로 모셔오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가족 4명 중국-라오스 거쳐 방콕에 안착시켜
당시 정부에서는 탈북자들의 브로커들을 차단할 목적 밑에 정착지원금을 대폭 축소했다. 가족들을 데려오자고 보니 중국의 탈북자 단속, 북한의 국경봉쇄 강화 등으로 인해 탈북자들의 입국을 돕는 브로커들이 크게 줄고 있었다. 가족을 맡길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어렵사리 찾은 브로커들이 요구한 돈은 태국까지 일인당 한국 돈 4백만 원, 몽골까지는 3백50만원. 가족 3명을 탈출시키자면 대략 1천5백 만원 정도가 비용이 필요했다. 내 여력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액수였다.
탈출비용은 후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나는 가족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만사를 제쳐두고 중국으로 향했다. 1997년 “중국 식당에서 일하면 월급 1천원을 준다”는 말에 솔깃해 국경을 넘었던 나와 어머니는 거의 8년 만에야 상봉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연길의 한 여관에서 실컷 울었다.
다시 가족들을 그 사지판으로 되돌려 보낼 수 없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툭 털어놓고 이야기 했다. “엄마, 난 중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조선에서 산다. 우리같이 남조선에 가서 살자.” 순간 어머니는 “아니, 그럼 네가 남조선에 나갔다고…… 아이구…… 난 안 간다.”고 단마디로 잘랐다.
미국 놈이 욱실거리고, 깡패들이 살판 치는 남조선에 나가 어떻게 살겠는가 하는 ‘근심’ 때문이다.
함께 온 언니도 “북으로 다시 돌려보내 달라”며 고집을 부렸다. 더구나 “넌 몇 년 동안 나가 살더니 변했구나”고 질책한다. 사실 브로커들과 연계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가족을 이해시키기가 곱절 더 어려웠다.
언니는 중국 구경도 한 번 못해봤으니 외부 세계의 실정을 너무 몰랐다. 당연히 언니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하긴 나도 중국에 처음 넘어왔을 때 언니와 뭐가 달랐을까,
그런 언니가 변하게 된 계기는 중국의 대도시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중국 요녕성의 성도(省都)인 선양(沈陽)시에 머무르는 동안 언니는 현대화된 중국의 모습과 물질적인 풍요에 놀랐고 결국 마음을 돌렸다.
계속하여 나는 제3국으로 인도할 브로커들을 찾았지만 쉽게 선이 닿지 않았다. 한국에서 알고 있던 브로커들은 이미 손을 뗐고, 중국 내 브로커들도 종적을 감춰버린 뒤라 중국에 한동안 머물러야 했다.
중국은 한시도 마음 놓을 곳이 못 되었다. 중국 신분증이 없고 중국말도 못하는 우리 가족은 단속에 걸릴까 봐 매일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내가 탈출할 때 밟았던 그 길을 따라 가족을 인도하기로 결심했다.
국경통과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은 중국-라오스 국경이었다. 국경을 넘는 과정에 중국 경비대에 걸리면 대부분 북송 된다. 라오스나 태국과 달리 중국은 북한과 ‘조중범죄자 인도조약’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남방 도시 쿤밍(昆明)에 도착한 나는 현지 지리에 밝은 브로커들을 찾고 직접 월경코스를 답사하는 등 주도 면밀한 계획을 세운 끝에 지난 6월 20일 가슴을 졸이며 중국-라오스국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돌아보니 북한이 제일 가난하구나”
북한에서 암흑세상만 보아온 언니는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대낮같이 환한 중국 선양 거리를 보고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라오스, 태국을 보고 나서는 나의 손을 꼭 잡으며 “아무리 둘러봐야 조선(북한)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하구나”며 털어놓았다.
메콩강을 건너고, 태국경찰을 피하며 방콕주재 한국대사관에 들어가기까지 나는 가족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자유를 찾는 길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노정인가를 실제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 과정에 가족애도 더욱 돈독해진 것 같다.
내가 북한의 가족들을 인도해 넘은 중국-라오스-태국까지는 거리는 장장 6천km, 수만 리 여정이다.
어머니와 언니는 하나원을 졸업하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 어머니는 지금도 나에게 “고맙다. 내 딸아, 네가 기어코 8년 전 약속을 지켜주었구나.”고 말한다. 가족의 행복을 개척하는데 공헌한 딸에게 주는 어머니의 진정한 ‘감사’의 말이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어머니의 국경 넘던 이야기를 듣고 나를 보며 “너는 사내들보다 낫구나, 정말 대장부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 죽음을 각오하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나는 이제부터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열심히 살 결심이다. 그 동안 북한에 남겨둔 가족 때문에 하루도 편히 지낼 수 없었던 그 짐을 덜어놓았으니, 이제 한숨을 돌리게 된 것이다.
서금순(가명, 27세)
함흥출신, 1997년 탈북 2003년 8월 입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