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북한은 그동안 이 전투를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 득실을 따져야 한다. 그러나 시작과는 달리 마감은 용두사미(龍頭蛇尾) 격이다. 전체 주민을 동원해 일사 분란하게 벌이던 기세에 비해 눈에 띄게 자랑할 만한 성과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전투가 개시된 지 3개월 만에 북한매체들이 중간 총화 격으로 “150일 전투를 전개한 뒤 생산과 건설에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기적과 혁신이 창조됐다”고 보도했지만, 구체적인 부문별 성과는 없고, 다만 ‘수천 개의 공장, 기업소들이 생산계획을 앞당겨 완성했다’는 원론적인 자랑뿐이다.
150일 전투는 김정일의 건강 이상설 이후 김정운의 후계자 내정이 본격화 되던 시기와 때를 같이해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에 따른 유엔대북제재가 가시화되던 시점에서 발기됐다.
북한이 150일 전투를 벌이는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했다. 김정운의 후계업적 만들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인한 국제사회 제재 피하기, 주민통제용 등 여러 가지 설이 나왔다.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사된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실험은 유엔 대북결의 1874호의 통과를 불렀고, 우방국인 중국도 이에 동참하는 분위기였다. 북한이 자칫 국제사회와 마찰을 빚고, 또 내부에서 김정일의 건강악화로 내성을 키우지 못한다면 체제붕괴라는 중대국면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이다.
군량미도 제대로 걷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북한이 식량을 자체로 확보하지 못할 경우, 대량아사를 초래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어디서 먹을 것을 줄 나라도 없으니 죽으나 사나 자체로 식량증산을 해서 체제 와해를 막아보자는 심산에 들고 나온 자구책이었던 셈이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 직후, 주민들에게 “우리는 인공지구위성을 쏘아 올린 정치 강국, 군사강국이다. 이제 경제 강국만 달성하면 강성대국이 된다”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어 대량 아사가 발생할 경우 정치 강국이건 군사강국이건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이렇게 되면 새롭게 후계자로 부상하기 시작한 ‘김정운 호’에 암울한 미래를 상속하게 된다.
나이도 어리고 정치경력도 없는 김정운의 다급한 후계 작업은 권력 상층부에서도 불신이 증폭되고 있는 양상이었다. 김정남과 김정운 양대 체제의 후계구도에서 내부의 복잡한 권력대립은 차세대 정치집단에 암울한 그늘을 던져주고 있었다.
김정일의 복잡한 가정편력에 대한 간부들의 불신도 증폭됐다. 김정일의 권위 하락은 곧바로 김정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내부분열과 체제와해를 초래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때문에 북한이 150일 전투에서 중요하게 내건 것은 김정운을 중심으로 하는 차세대 정치세력의 결집을 꾀하는 것이고, 유엔제재로 인한 내부 식량문제를 푸는 것이다.
지난 4월 북한 노동당 간부강연에 따르면 “우리가 올해에 일어서지 못하면 10년을 주저앉게 된다”고 강조한 점도 내부 분열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피폐된 경제구조 일신이 절박한 문제로 대두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때문에 150일 전투의 주요 목적은 간부들의 사상 검증을 통해 김정운 체제의 안정적 집권을 위한 제2의 중국판 ‘문화대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북한 지도부는 시장경제 요소를 뿌리 빼고 자력갱생에 기초한 대중적 노력혁신, 자립적 경제건설 노선을 잣대로 간부들의 대열정리부터 시작했다.
노동당 검열소조의 검증 행위는 개혁개방을 주장했던 문혁 당시 류사오치(劉少奇) 부주석에게 몰매를 퍼붓던 홍위병의 모습과 흡사했다.
북한은 150일 전투 개시와 함께 노동당 조직지도부 검열소조를 각 지방에 내려 보내 간부들에 대한 뒷조사를 진행했다. ‘인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모양새를 갖추고 현장에 내려간 당 검열소조들은 주민들과 침식을 같이 하면서 ‘당에 충실한 간부와 그렇지 못한 간부’를 갈라놓았다.
이때 검열에 걸린 간부들은 대중들 앞에서 공개비판을 당하고 혁명화 대상이 되어 곧바로 노동현장으로 쫓겨났고, 정치범 수용소, 노동단련대로 끌려갔다.
이번 간부 검열에는 북한의 헌법상 최고 통치기관인 국방위원회까지 가세하면서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동안 피폐해진 인민생활의 원인이 노동당의 애민정책(愛民政策)을 받들지 않고 동상이몽(同床異夢)한 일부 중간단위 간부들의 책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90년대 중반 대량 아사의 책임을 서관희나 김만금 등 일부 농업관련 간부들의 죄행으로 만들어버린 ‘심화조 사건’과 같은 맥락이다.
한편 주민들을 노동현장에 매일 투하해 다른 잡생각을 하지 못하게 뺑뺑이 돌렸다. 도로와 골목에는 단속초소가 생겨나고 낮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농장과 건설현장에 내보냈다. 장마당 운영 시간을 줄이고 심지어 지나가는 화물자동차를 세우고 차에 탄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논밭으로 내모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보안서와 보위부 등 감시기관들은 결근자와 사회단체 누락자들을 적발했다. 조직에 구속되지 않고 일정한 직장이 없이 장사하던 사회보장자(신체 및 정신이상으로 사회적 혜택을 받는 자)들이 그 조사대상에 올랐다.
각 인민병원에 비치된 사회보장자 병력서를 재조사해 당사자는 물론 뇌물을 받고 병력서를 위조한 의사들까지 모두 처벌대상이 됐다.
북한이 이번 150일 전투에서 주력한 부분은 농업과 건설 부문이다. 당초 북한은 올해 경제성장 목표를 4대 선행부문에서 ▲전력 776만㎾ ▲석탄생산 3,500만t ▲철도 화물 운수 능력 7,320만t 수준, ▲곡물생산 600만t으로 잡았다.
강성대국 건설 목표로 주민 소득 2,500달러 수준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니 이번 전투를 통해 1987년 수준으로 경제적 기초를 마련한다는 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국의 자본과 기술이 없이 순수 자력갱생으로 재래식 경제구조를 기술집약형 선진 기술로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 가능성이 없었다.
북한은 150일 전투 전 기간 일관성 있게 농촌에 힘을 총집중 했다. 워낙 먹는 문제를 풀자고 시작한 전투인 만큼 “밥숟가락 드는 사람은 총동원”이었다.
그러나 비료와 농기계가 태부족한 상황에서 벌어진 순전히 인력전이였다. 아침 5시에 논판에 나가 9시 되어서야 별을 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렇게 총력전을 펼쳤음에도 비료부족, 종자 문제 등 여러 가지 악재들이 겹치면서 사실상 농사가 망했다는 실망스런 이야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올해 새롭게 개발한 신품종 종자를 도입했다가 부실종자로 인해 빈포기가 속출했고, 비료는 지난해에 비해 60% 수준에도 못 미쳤다. 게다가 동해안 일대에 일조량이 적어지고 냉해가 침습하면서 농작물 상황은 열악했다.
건설 분야에서도 새롭게 정한 대규모 건설대상은 없고 다만 기존의 건물을 까부수고 개보수 하는데 그쳤다. 중국에서 건너다보이는 국경지역인 신의주와 혜산시의 도로주변 아파트들에 설치된 베란다 창문틀은 모두 뜯겨나갔다.
햇빛이 잘 들어 세탁물 말리기도 좋고, 먼지가 들어오지 않고, 겨울에 보온(保溫) 효과에도 좋아 너도나도 설치했던 베란다 창문틀이 뜯겨나가자 신의주 시민들은 “난방도 해결 못 해주면서 그냥 없애라고 하면 겨울엔 추워서 어떻게 살라는 소린가”며 단속반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철거된 알미늄이나 플라스틱 창물 틀과 유리를 끼우는데도 미화 약 50달러 이상 들었다. 북한 노동자 월급이 2천원(미화 0.5달러)이니 50달러는 100개월 월급에 해당하는 거금이니 주인들이 분통이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전민 노력 총동원이니 자연히 주민들의 삶의 터전은 황폐화됐다. 전투기간 장마당 운영시간이 제한되면서 주민들의 불편을 가증시켰다. 150일 전투기간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장마당 개장이 허용되고, 나머지 시간에는 시장 문을 닫고 내쫓는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 하는 주민들에게 있어 시장운영 제한은 그야말로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아침에 일찍 맷돌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고 일하러 나갔다 들어오면서 장마당에서 팔아야 겨우 하루 살 수 있었다. 죽기내기로 팔아봐야 남는 것은 두부 찌기밖에 남지 않는다.
당국의 시장통제가 강화되면서 청진 수남 시장에서는 6월 초에 쌀 가격이 1kg당 2,300원까지 폭등하기도 했다. 신의주의 한 주민은 “평양시도 7월 초에 한 달에 1주일 정도 밖에 배급을 주지 못한다”면서 “신의주는 아예 배급이 끊어진 지 오래됐다”고 전했다.
150일 전투가 당초 계획했던 경제 건설이 아니라 시장을 통한 생존 자율권을 억제하고 시장을 박멸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경제적 기반이 빈약한 북한이 자체로 경제를 재건한다는 것은 어렵다. 150일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서도 전기가 부족해 열차가 제대로 운행되지 못하고 평양시를 제외한 지방에는 주민용 전기도 공급하지 못해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150일 전투가 사람을 잡는다”고 불만을 터놓고 있다. 이제 150일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또 100일 전투가 시작된다고 한다. 이러한 무모한 전투를 통해서 북한은 경제가 살아나든 인민이 굶어 죽든 상관없다. 오직 체제 유지를 위해 인민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이다. 아마도 미북관계가 개선되고 국제사회의 제재가 완화되고 체제가 안정기를 찾을 때까지 이러한 전투는 계속 될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경제 부진의 책임을 지고 또 내각의 지각 변동이 예견된다. 이번 전투가 경제 분야에서의 대약진이었기 때문에 내각은 각 공장, 기업소에 부분별 계획을 내려 보내고 노동당은 이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로 주민들을 동원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북한의 권력구조로 볼 때 군부나 당 권력에 있는 소위 충성분자들은 70~80대의 고령층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고수한다. 역으로 내각에는 젊은 층이 포진되어 있지만, 단명이다.
150일 전투를 통해 본 북한의 모습은 아무리 대규모 전투를 벌인 다해도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국가로 문을 열고 나오기 전까지는 달라질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여준 하나의 계기라고 하겠다.
한정호. 성통만사 칼럼리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