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중국 길림성 00시에 숨어 살고 있는 탈북자이다. 북한에서 가장 어려웠던 98년 탈북 했다가 한차례 북송된 적이 있는 나는 공안의 눈을 피해 중국의 한 농촌마을에서 조용히 숨어 지내고 있다.
20대의 처녀의 몸으로 두만강을 건너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어느덧 나도 40대에 접어들었다. 지금은 내 신세를 한탄하면서 앞날을 단념한지 오래다. 지금 나이면 동창들도 아이를 거느리고, 행복한 가정도 가졌겠지만, 나에게는 가정도 없고 자식도 없는 홀몸이다.
처음 중국에 들어올 때는 돈을 벌어가지고 북한에 나가서 장사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두만강을 넘자마자 두 번씩이나 인신매매의 덫에 걸려 팔린 나는 마음에 없는 결혼을 했다가 다시 갈라지는 아픔을 겪어 지금은 가정을 가지는 것조차 두렵다. 지금도 가만히 누워 생각해보면 두만강을 넘어 중국에 들어오던 때를 잊을 수 없다.
“살기 위해 몸부림 쳤지만, 온가족이 깨졌다”
우리 집은 함경북도 명천군이라는 곳이다. 아버지는 기계공장 노력혁신자였고, 어머니는 고등중학교 교원이었다. 나에게는 남동생이 한명 있었다. 80년대 말까지 아버지가 공장에서 일을 할 때만 해도 배급은 그럭저럭 받아 생활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9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함경북도 지방에서 제일 먼저 국가배급이 끊겼다. 처음에는 보름 배급에 닷새 정도 식량 절약을 하라며 떼어 내더니 93년에는 배급이 완전히 끊겼다. 아버지 직장에서는 원료가 없어 생산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어머니도 학교일을 그만두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장사에 나섰다. 나와 동생은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 장마당에서 팔았다. 그런데 산도 한해 두해 벌거벗더니 산 속으로 두 시간씩 꼬박 걸어야 들어가야 나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황폐화 되었다. 하루 나무 한 리어카를 해야 쌀 1kg을 겨우 살 수 있었다.
게다가 나무를 찍어 판다고 산림경영소 산림감독대에서 벌금을 물리고 리어카를 압수했다. 우리 집 살림은 한해 두해 지나면서 생활이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쪼들려만 갔다. 우리 집안은 식장과 이불장, 책장, 책 등 돈 될 만한 물건은 모두 내다 팔았다.
94년 김일성 사망 때에도 우리 집안은 조의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끓일 것이 없어 굶었다. 이렇게 한두 해 지나더니 96년 초에는 아버지가 제일 먼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떠나오던 98년에는 어머니마저 영양실조에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은 꽃제비가 되어 집을 나가 행방불명되었다.
졸지에 홀몸이 된 나는 의지할 곳을 찾아 회령에 있는 고모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고모를 도와 장마당에서 두부를 앗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98년에 들어서면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는 북한 사람들이 많았다. 소문에는 중국에 들어가서 하루 일하면 중국 돈 20원은 벌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
당시 중국 돈 1원은 북한 돈 25원이었다. 중국에서 하루 20원을 벌면 북한에서 500원 버는 것과 같았다. 북한에서 하루에 50원 정도 버는 우리에게는 일확천금이었다. 나는 이렇게 단순하게 계산하고 고모에게 “1년만 중국에 들어가 돈을 벌고 나오면 이런 가난을 면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고모는 “그렇게 벌면 좋긴 한데 여자들이 많이 들어간다는 말은 있지만, 아직까지 돈 벌어 가지고 나왔다는 사람은 못 봤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래도 고생이고 저래도 고생인데 눈 딱 감고 한번만 승인해달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어 나는 중국으로 안내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처음 나를 두만강에로 넘겨준 사람은 중국으로 자주 왕래하는 한 아줌마였다. 그는 중국을 자주 다녀 국경경비대 군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도강비용을 내지 않고 중국 용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자리를 주겠다는 인신매매의 말에 속아
그때가 1998년 3월 이었다. 그 아줌마는 나에게 중국에 가서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팔려간다는 것을 두만강을 건너 용정에 도착할 때까지 몰랐다. 그러나 그가 연길에 도착해서는 어느 한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나더러 자기의 이모의 딸이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모부가 죽어서 중국에 왔다고 말하라고 한다. 그는 자기 친척이라고 그 집 주인을 내게 소개하더니 그 친척에게서 중국 돈 2천원을 받아가지고 유유히 사라졌다. 후에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나를 소개해주고 그 값으로 2천원을 받아간 것이다.
그 친척은 그 여자가 떠나간 다음 다시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하더니 길림성 돈화의 한 중국한족에게 나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돈화사람은 나를 자기 친구 집에다 맡겨놓고 나를 팔기 위해 돈화 시내로 들어갔다.
그때 조선 사람을 한명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는 통역이었다. 그 통역이 하는 말이 지금 이 돈화 사람이 나를 중국 돈 7천~8천원에 팔려고 한다고 말했다.
나는 겁이 버럭 났다. 어떻게 사람의 운명을 돈으로 파는가, 북한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질겁한 나를 보더니 그 조선족 통역은 나에게 조용히 중국 돈 100원을 주겠으니 소변을 보겠다고 하고 도망치라고 귀띔했다.
다음 날에 그 조선족 통역이 또 찾아왔다. 그 조선족은 자기를 따라 자기 집에 가자고 말했다.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중국 공안이 나를 잡으러 온 것이다. 이유인즉 그 조선족 통역이 북조선 여자를 데리고 간 것을 알고 나를 팔려고 했던 중국 사람이 다짜고짜로 통역에게 나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린 것이다.
그러자, 조선족은 자기 친구가 있는 공안에 알려 나를 붙잡게 하고 그 중국 한족을 떼어 버린 것이다. 나는 파출소에 들어가 간단하게 조사를 받고 그 파출소에서 식당일을 하는 한 조선족 여인의 소개를 받아 그의 조카가 살고 있는 길림시 반석진으로 나왔다.
나는 거기서 그 식당 아줌마의 조카와 2년 반을 함께 살았다. 그 집은 살림이 아주 어려웠다. 그리고 남편도 내 마음에 썩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중국말도 한마디 모르는 내가 어디 도망칠 수도 없었다.
“중국에서 먹던 쌀밥 생각 간절해”
그러던 도중 나는 한 차례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당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집에서 밤에 자고 있었는데, 한 밤중에 중국공안 4명이 집에 들이 닥쳤다. 당시 북조선에서 조선 사람들을 잡아 내보내달라고 중국 정부에 요구했다고 한다.
그 때는 2000년 9월이었다. 내 남편은 항의도 못하고 빨리 돌려보내겠다는 공안들의 말을 믿었다. 그때 돈을 내면 나올 수도 있었지만, 구차한 우리 살림에 나를 구원할 돈이 없었다.
나는 길림시 반석진에서 잡혀가지고 연길을 거쳐 도문 변방대로 압송되었다. 반석에서 도문으로 갈 때 버스를 타고 나갔는데 공안이 한 사람씩 맡아 족쇄를 채웠다.
도문변방대 감옥으로 갈 때 우리 일행은 모두 6명이었다. 그런데 도문 감옥에 가보니 탈북자들이 100여명이 좁은 감옥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더 많았다.
남자들은 깊은 산속이나 홀몸이어서 잘 피해 다니지만 여자들은 한 곳에 정착되어 살다보니 공안들이 누구네 집에 탈북자가 산다는 것을 손금 보듯이 알고 있어 더 많이 붙잡힌 것이다.
보름 후에 우리는 온성군 보위부로 끌려 나갔다. 온성 보위부에서는 여자들을 별로 때리거나 기합을 주지 않았다. 나는 돈이 없어 가지고 나가지 못했지만, 돈을 가지고 나갔던 사람들은 따로 불리워 나가 모조리 빼앗겼다.
온성군 보위부에서 나는 죽도록 앓았다. 39도의 고열과 함께 두통으로 인해 나는 감옥에서 계속 누워있었다. 간수들은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고 “중국에서 똥 되놈에게 시집가더니 죽을병에 걸렸다”고 놀려댔다.
다행히 우리는 단순 생계형 도강자로 분류되어 빨리 나왔다. 명천군 안전부로 이송된 나는 며칠 후에 내가 살던 고장으로 가게 되었다. 내가 살던 집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내가 거처할 곳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내가 다니던 공장에서는 공장 기숙사에 나를 거주시키고 그곳에서 합숙생활을 하게 했다. 지겨운 조직생활, 합숙생활 규정, 내가 이미 중국에서 맛보았던 자유로움은 이 모든 것을 짜증나게 했다. 먹는 것도 형편없었다. 시래기 국에 강냉이밥을 먹자니 중국에서 먹는 쌀밥과 고기 생각이 간절했다.
나는 도저히 북한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간밤을 이용해 고모가 살고 있는 회령으로 달아났다. 회령으로 가던 도중에 회령시 기차역전에서 중국에 갔다가 한 차례 잡혀 나왔다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중국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었고, 그도 역시 나에게 중국에 갈 마음이 있는 가고 물었다. 나는 감옥에 있다가 방금 나오는 길이어서 돈이 없다. 네가 먼저 대고 내가 중국에 도착하면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북한에 미련 버리고 재탈북에 나서
그는 이에 응하고 우리는 그날 밤에 두만강을 다시 넘었다. 중국 연길에 도착한 나는 원래 나와 살던 중국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돈이 없어 그곳까지 갈 수 없으니 데리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남편을 기다리는 보름 동안 이 북조선 여자는 나더러 다시 조선에 넘어가라고 말했다. 내가 죽어도 조선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자, 그 집주인은 나를 팔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돈이 요구되면 다시 팔라, 그러나 나를 조선족에게 팔아달라고 간청했다. 기회를 봐서 그 집에서 도망쳐 나오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주인은 나를 받지 못하고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보름 만에 내 원래 남편이 나를 데리러 왔다. 그때부터 나는 이 남편과 5년 동안 살았다.
그 다음 불행은 다시 찾아왔다. 내가 돌아온 지 한 달 지나서 내 남편은 우루과이라는 곳으로 일하러 갔다. 약 2년 동안 그를 기다리며 살던 와중에 남편의 형님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형님에게는 아이가 두 명이 있었다. 우리는 아직 애기가 생기지 않아 없이 지내던 찰나였다. 내 남편이 돌아오자, 시어머니는 나에게 아이를 따로 낳지 말고 형님의 아이들이나 키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조카는 조카이고 나도 제 새끼를 키워야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래 나는 남편에게 형님의 아들은 아들이고 나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가족이 북한에 없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맨 몸밖에 없지 않는가, 당신한테는 그래도 조카들이 있으니 믿을 데가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고는 속이 상해서 술이나 한잔 마시고 속을 썩으면서도 내색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시어머니와 온 가족이 모여 토론하더니 그 형님 아줌마와 내 남편이 함께 살게 하고 나더러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저는 못나간다. 중국이 어떤 사회인가, 돈 없이 못사는데 그러면 돈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나에게 중국 돈 2천원을 주어 내보냈다.
“가고 파도 돈 없어 한국에 못가”
그때가 2003년이었다. 나는 그 돈을 가지고 료녕성 심양시에 나왔다. 심양은 중국 동북지방의 성 소재지이다. 그곳에는 한국 사람들도 많이 사는데 특히 서탑가(西塔街)에는 한국인이 많았다. 거기에는 탈북자들도 많이 은신해 살고 있다.
우선 그곳에 월 300원짜리 월세를 주고 방 한 칸을 얻었다. 그 다음부터는 나는 다시 팔리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돈을 벌기 위해 여기 저기 뛰어 다녔다.
나는 가정보모, 식당일 등 닥치는 대로 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러나 중국말을 제대로 못하니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북조선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말 몇 마디만 해보면 금방 알게 된다. 그리고 식당들도 조선 사람을 쓰다 걸리면 벌금을 하기 때문에 받기를 꺼려한다.
중국에 들어온 북한 여성들이 처음에 인신매매를 당하는 것도 중국말을 몰라서다. 중국에 처음 들어오는 여성들은 마음에 있든 없든, 한번은 팔리게 된다. 인신매매도 우리가 처음에 겪을 때는 별로 불쾌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도 먹고 살기 위해 남의 나라 땅에 들어왔고, 우리를 팔아먹은 인신매매들도 우리를 안내하는 줄 알았다.
결국 우리도 살자고 한 노릇이고, 인신매매들도 살자고 한 노릇이다. 결국은 인신매매도 나라가 못살아서 생겨난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국적이 없는 것이다. 국적이 없으니 마음의 권리가 없어 제일 걱정이다. 요즘은 중국 공안이 탈북자 단속을 집중적으로 하지 않아 마음이 좀 놓이지만, 여전히 호구(호적)가 없는 나에게는 악몽과 같은 세월이다.
우리는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해도 같은 조선족들과는 별로 불편을 못 느낀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고통을 느낀다. 나도 농촌에 있을 때 술도 하고 돼지도 키우고 했지만, 돈을 벌지 못했다. 빚이 많다나니 돈을 버는 족족 다 갚는데 쓰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돈을 벌어가지고 북조선에 나갈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어렵다. 내가 10년 이상 행방불명되었는데 이제 북조선 안전부와 보위부에 가서 뭐라고 설명하겠는가, 그들은 내가 중국에서 10년 살았다고 하면 감옥에 걷어 넣고 죽일 것이다. 더구나 내게는 북한에 나가야 반겨줄 가족도 없다. 그래도 중국은 밥은 먹고 살기 때문에 그럭저럭 괴로워도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에서 여러 번 팔려 다니며 젊음을 놓친 내가 다시 시작하기도 겁난다. 지금도 가만히 누우면 행복한 가정을 갖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 그러나 겁나고 점점 싫어진다.
한국에 가고 싶어도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여전히 겁이 난다. 물론 한국으로 갈 돈도 없거니와 한국에서는 중국과 달리 열심히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공포심에 망설이게 된다.
한국으로 가자고 해도 정확한 안내자도 만나기 힘들고 가다가 잡히면 또다시 북한에 끌려가야 하기 때문에 여러 번 한국행을 결심했다가도 주저하게 된다. 아마도 나처럼 중국에서 삶의 목표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북한 여성들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나도 인간처럼 권리를 가지고 살날이 언제면 올까...
중국 00시 거주 탈북 여성 김정순
미국에 사는 교포입니다.
글을 읽으면서 - 1998/ 2000/ 2003 년에 도문/연길 다녀왔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북한-도문 다리에서 본 회색 두만江
연길驛 에서 어깨너머 눈치로 본 - 탈북하신 분들
그냥 뚜덕뚜덕 걸어보던 연길 끄트머리 서시장 풍경
저의 이복형제도 북한에 살고계십니다.
그 분들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가끔 생각해봅니다.
김정순님 -
작은 힘이라도 혹시 보탬이 될까해서- 저는
탈북한 학생분들의 학습지도에 관심을 갖고있습니다.
탈북하신 분들을 돕고자 하는
같은 뜻을 가지신 분들이 남한에 많으리라 짐작합니다.
어떤 길이 -
김정순 님께 올바른 선택이 될지-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
위험한 길이 될수도 있고,
그 댓가로 지불해야 할 고통이 눈에 어른하기 때문일것입니다.
짐작하시는대로-
한국은 자유는 있지만, 치열한 경쟁이 있습니다.
그 치열한 생활속에서 가끔 좋은일/좋은 사람들을 보기도 합니다.
김정순님 - 앞길에
좋은 일들이 있기를 하늘에 빌겠습니다.




글을 읽어 내려갈 수록 탈북 여성이 겪는 아픔을 생생히 느낄수 있어 가슴이 찢기 듯 아픕니다.
20대 꽃나이 무엇을 했느냐 그 누가 묻는다면 어둠의 젊은 시절이였다고 말할 것 같네요.
저도 탈북 여성입니다.
비록 김정순씨와 같은 어려움은 겪은 적 없지만 우리 탈북 여성들이 삶이 너무 너무 슬픕니다.
북한이 가르쳤던 한국이 아니란 것쯤은 김정순님도 알고 계시곘죠?
한국은 무서운 나라가 아닙니다. 중국에서의 그 노력이면 여기서도 훌륭히, 잘 살수 있습니다.
하루 빨리 자유 대한민국에 오셔서 자유 다운 자유를 만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날이야 말로 김정순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권리를 가지고 사는 날들이라고 느낄 겁니다.
용기 내셔서 새로운 도전을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