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어딘가 살아 계실거야”

 

북한과 중국에서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우리 가족이 한국에 입국한지 벌써 5년이 되어온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에서 살았던 시절 아버님 생각, 그리고 두만강을 넘어 중국에서 살았던 시절, 인천공항을 들어서며 만세를 불렀던 그 시절이 눈앞에 선하다. 아마 고생을 너무 많이 했던 시간이어서 더욱 잊히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가족은 100일간의 중국영사관 생활을 거쳐 2003년 1월 26일, 드디어 대한민국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착륙하려는 것이 느껴질 때 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동안의 설음과 감격이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1달 반 동안의 국정원 조사 기간을 마치고 하나원에서의 3달간 생활을 마친 후 한국 사회의 첫 발을 내딛었다. 드디어 <나의>, <우리 가족>만의 집이 생긴 것이다.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감격했다.

2004년 초 여름, 그동안 행복한, 맘 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어느 한시도 아버지를 잊은 적이 없었다. 흰쌀밥을 맞이했을 때에도, 아버지 생일날을 맞을 때에도 어머니에게는 내색하지 못했지만 늘 아빠생각에 밤이면 눈물로 베개 깃을 적셨다.

 

요즘 우리가 애청하는 프로그램은 방송이다. 그날이 되면 우리는 즐겁게 TV앞에 마주앉아 또 잘 하는 사람들한테는 전화로 번호를 눌러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언니가 나한테 “우리도 한번 나가보자”고 하면서 신청을 했다.

 

그렇게 되어 우리 두 자매는 그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방송에서 "출연하게 된 동기를 말하라"고 이금희 아나운서가 말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아직 중국 어디에서 떠돌아다니실 아빠 얘기를 했다. 중국에 있을 때 만나지 못했고 "이 방송을 아빠가 혹시라도 보신다면 꼭 한국에 넘어와 달라"고 전했다.

 

그날 우리는 1승을 했고, 그 다음주에 2승을 했다. 그 후 3연승과 ‘왕 중 왕’ 전까지 가게 되면서 한 달 동안 방송에 거의 매주 출연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반년 후 어느 날. 북한친척들과 연락을 하던 도중 그동안 수소문을 했던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중국에 계시던 아버지가 방송에 출연하는 우리 모습을 보시고 한국대사관을 통해서 한국행을 시도 하셨다고 했다. 공안들과 몸싸움(우리가 했던 그 방식)을 하던 중 북송당하셨고 북한감옥에서 온갖 고문이란 고문은 다 당하셨다. 온 몸은 상처투성인데 약은 고사하고 상처들이 아물기도 전에 맞은데 또 맞고, 또 맞아 결국 상처가 악화되어 그만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전해주는 친척조차도 미웠다. 하늘이 무심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이 세셨던 아버지인데, 그 큰 소도 한 번에 넘어뜨렸던 아버지신데 그 고문을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흰쌀밥을 해 드린 적이 없었고 끼니다운 끼니를 대접한 적이 없었다. 대접한건 오직 젓가락을 아무리 휘저어도 건질 것이 없었던 멀건 국수 죽에 무절임 몇 조각뿐이었다. 세상에 비극이라도 이런 비극이 어디 있을까?

 

언니를 찾아 중국으로 탈출


우리의 북한탈출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북한과 중국을 거쳐 남한으로 자유를 찾아오던 우리가족의 탈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998년 6월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웬 남자가 찾아왔다. 먼저 중국으로 떠난 언니가 갈 때 함께 갔었다면서 보낸 편지를 내 밀었다.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잘 지내시죠? 저 때문에 너무 신경 쓰셔서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힘들게 우리를 먹여 살리겠다고 애쓰는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맏딸이 돼 가지고 직장 출근만 했지 맏딸로써의 아무런 역할도 못해서 늘 죄스러운 마음뿐이었습니다.

 

남자 친구가 결혼을 시켜달라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고 하는데 우리 집 형편이야 불 보듯 뻔하지  않습니까? 어머니께 덜 근심 끼쳐드리려고 이런 결심을 했었습니다. 중국에서 딱 일주일만 일해주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는 언니의 소개를 받아가지고 지금 이 편지를 가져가는 사람과 중국으로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만강 물에 들어서서 바로 국경경비대들한테 붙잡히게 되었어요. 중국 쪽에서 우리가 넘어오길 기다리던 조선족 사람이 우리 쪽으로 넘어와서 중국 돈 4백 원을 주고 붙잡힌 저를 빼냈습니다. 간신히 중국으로 넘어오긴 했지만 저 때문에 돈 쓴 그 사람한테 갚아줘야 하겠기에 원래 일주일로 잡았던 것이 어쩌면 더 많이 늦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기다려 주세요. 꼭 돈 벌어서 돌아갈게요. 사랑하는 내 동생들아 못난 큰언니라 너무 미안하구나. 언니가 맛있는 거 많이 가져갈 거니까 꼭 기다려 줘. 어머니를 부탁한다.“

 

편지지의 여러 곳에 얼룩자국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물론 어머니도 찾아온 그 남자가 죽을 만큼 미웠다. 그럼 도대체 내 딸은 어디에 있냐고 물으셨다. 남자는 두만강 건너편 길진 이라는 마을의 아는 사람 집에 있다고 했다. 그 집에만 가면 큰언니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태지 않아 48시간을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우리 세 식구는 고민을 했다. 아버지도 잃어버리고, 큰 언니마저 사라지고, 많지 않은 우리 5식구가  이젠 3명으로 줄게 생겼는데 어떻게 큰언니를 그렇게 내버려 두겠냐고, 언니 찾으러 갈 것이라고 엄마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엄마마저 큰언니 찾으러 혼자 떠나면 결국 둘째언니와 나만 남게 되는데 만약에 큰언니를 찾지 못하게 되면 우리와도 생이별을 당하면 어쩌겠냐면서 어머니는 같이 떠나자고 했다. 둘만 남는 게 무서웠던 찰나에 우리는 쾌히 머리를 끄떡 거렸다. 가게 되면 어떻게 갈 것이며, 어떤 경로와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를 토의해야 하는데 워낙 방음장치가 잘 안 되어있는 집들이라서 옆집에서 말하는 소리는 다 들을 수 있다.

 

우리는 나무하러 가는 척 하면서 뒷산으로 올라갔다. 산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할까봐 우리는 서로 자기 배낭에 삭정이를 주어 넣으면서 가끔씩 모여 토의를 했다. 나뭇가지 하나를 가지고 땅에 그림까지 그리면서.

 

집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초 긴장상태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사진첩을 꺼내어 특별한 사진들만 조심스럽게 떼어 내서는 하나하나 비닐로 싸고 또 싸셨다. 물을 건널 때 젓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사진 여러 장을 떼어 내면서 아버지의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

 

국경경비대에게 돈을 주고 두만강을 건느다

 

칠성리 산속에서 우리는 날이 어둡기를 기다리고 있다. 더위를 먹은 나는 거의 실신상태에 있었다. 해는 이미 저 산 너머에 들어가 버렸고 8시가 넘으니 주위가 어두워 졌다. 한 국경 경비 대원에게 돈은 이미 찔러 준 상태이고 그 경비대원이 우리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9시가 좀 넘으니 어머니와 편지를 전해줬던 그 남자와 경비대원이 돌아왔다. 우리는 경비대원의 뒤를 따라 신속히 발자국소리를 죽이면서 산속에서 나와 강 쪽으로 갔다.

 

물살이 제법 셌다. 어머니와 우리는 서로 손을 꼭 잡고 한발자국, 또 한발자국 내 딛으면서 중국 쪽을 향해 건너기 시작했다. 우리가 강을 건너는 소리가 어찌 그리도 크게 들렸는지 심장이 다 조여들었다. 드디어 중국 땅이 바로 앞에 있었다. 강을 다 건너서 우리는 가지고 왔던 여벌옷으로 갈아입고 처음부터 안내를 했던  남자 뒤를 따라 큰언니가 있다는 그 중국집을 찾아갔다.

 

어머니와 그 남자가 다투고 있다. 우리가 오기 하루 전 날에 큰 언니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니가 집에서부터 입고 나갔던 옷과 언니가 쓰던 화장품 통을 받았다. 큰 언니를 만나기는 이미 글렀고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다시 북한으로 넘어가자며 그 집을 나왔다.

 

집 주인과 우리를 안내 했던 남자는 어머니를 말렸다. 중국 공안이 지금 두만강 지대를 순찰하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가족 모두가 사라진 걸 동네에서 알게 되면 분명히 감옥가게 됐으니 한시라도 날이 새기 전에 우리는 다시 넘어가야만 했다. 그때 중국 공안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우리가 머문 그 중국집 근처에 멈춰 섰다. 집 주인은 공안들이 가택수색을 할 것이라고 하며 빨리 숨으라고 했다.

 

다시 그 집에 들어가서 집 주인이 안내하는 대로 우리는 그 집 천정으로 올라갔다. 지붕과 천정사이에 높이가 1m정도 되는 공간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 공간에서 숨죽이고 숨어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공안인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더니 중국말로 큰 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집 주인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렇게 한 10여분동안 벅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해 졌다. 공기도 딱히 통하는데도 없는  지붕 위는 찜질방 같이 더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붕으로 집주인이 흰쌀밥과 우리가 넘어올 때 인사차로 가져왔던 문어를 가지고 요리한 음식을 가지고와서는 공안들이 아직 밖에 있어서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잠깐, 잠깐씩 잠들며 지붕위에서 날을 샜다. 오전 10시가 지나서 주인은 우리더러 내려오라고 했다. 땀으로 인해 우리 몸은 목욕하고 나온 듯이 다 젖어 있었다.

 

어머니가 집주인에서 바깥 동냥을 물으니 아직도 공안들이 동네 근처에 있다고 했다. 지난밤에 도강하는 사람들을 먼 곳에서부터 보고 추격했는데 아직 어느 집에 들어갔는지 찾지 못했다고 경찰들이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집 주인은 한국영화를 비디오로 보여주었다. 철없는 언니와 나는  그 집에서 주는 밥들을 먹으며 잠시 긴장을 풀고 영화들에 매혹되어 있었다.

 

해가 저물자 그 집 뒷산에 있는 사과 과수원 밭의 초가집으로 이동해서 숨었다. 내려다보니 정말로 공안 차 3대가 동네를 돌고 있었다. 무서웠다. 공안에 붙잡히면 살던 곳에서 예술인 집안으로 유명했던 우리 가족 모두가 감옥에 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친척들에게도 후과가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니 집 주인이 올라왔다. 주인은 우리를 모여 놓고 요즘 공안경비가 심하니 더 이상 이곳에 있게 되면 자기들도 위험해 진다고 하면서 연길 쪽으로 가라며 자신이 직접 그 곳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돌아갈 형편도 못되고 우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집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싫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집주인이 가지고 올라온 옷과 운동화로 갈아 신고 그 곳을 떠났다. 산을 넘고 끝도 안 보이는 큰 길을 따라 걷다가는 먼 곳에서부터 달려오는 자동차 라이트 불을 보면 바로 길옆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 차가 지나갈 때까지 숨어야 했다. 뱀이나 파충류를 정말 무서워하는 나로서는 그 짓이 죽기보다 싫었다. 때로는 어두워 분간 할 수 없는 숲속을 뛰어 들어가면 늪 같은 곳이었고 옷들은 거의 진흙탕 범벅이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연길 시내에 도착해서 집주인과 내통되어 있는 어느 한 집에 도착했다. 엄마와 둘째언니, 그리고 나는 서로 화장실가도 같이 따라갈 정도로 꼭 붙어서 다녔다. 혹시라도 서로 떨어질 가봐 모든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우리를 데려다 준 집주인은 돌아가고 그 곳에서 낮을 보내고 오후 5시쯤 되니 하얼빈 이라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팔려가다

 

그 집 밖에는 이미 택시 두 대가 와서 대기 하고 있었다. 같이 있던 여자가 엄마는 뒤에 택시에 태우고 우리는 앞에 택시에 태우려고 했다. 절대로 떨어져서 탈수는 없다고 하니 "이 연길 시내 내에서도 단속이 얼마나 심한데 한곳에 다 탔다가 검열에 걸리면 택시 기사가 통역해 주겠냐?"며 굳이 엄마는 뒤에 차에 태웠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갈라 탔고 이동하는 내내 불안한 언니와 나는 뒤차가 따라 오는지 계속 뒤쪽만 주시하고 있었다.

 

큰 네거리에서 차는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가 떨어지고 차가 떠나자 무의식중 언니와 나는 어머니가 탄 차가 따라 오는지 뒤를 돌아봤다. 그때 따라오던 차가 갑자기 신호 위반을 하면서 U턴을 하며 달려가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차를 보며 언니와 나는 막~ 울면서 무슨 일이냐고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들의 협박이 시작되었다. "니들이 더 이상 귀찮게 굴면 공안에 잡아넣겠다."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연길 시내의 어느 한 네거리에서 어머니와 헤어지고 나서는 사 주는 밥 한 숟가락도 뜨지 못한 채, 대형 버스를 갈아타고 하얼빈까지 들어왔다. 하얼빈에 도착한 날은 1998년 6월 28일 오전 11시 경. 그때부터 우리는 기차를 갈아타고 또다시 4여 시간을 달려 철려 라는 곳에 왔다. 언니와 나는 철려의 어느 한 집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중국남자 두 명과 가족 같아 보이는 사람들로 그 집은 북적 거렸고, 돈들을 주고받는 모습을 우리는 멍~ 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그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를 우리는 몰랐다. <인신매매>.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뭔지도 모르는 말이었다.

 

남자들 중 한 명은 32살이었고 다른 한사람은 28살이었다. 28살 되는 그 남자는 조폭같이 생겼다. 키가 170이 되나 마나한데 100키로는 더 되는 체격, 말 그대로 미련한 돼지같이 생겼다. 두 남자는 우리를 데리고 따사 (큰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옷을 사 입히고, 사진관에 가서 사진도 찍게 했다.

 

그런 후 언니는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면서 그 남자가 말했다. 그렇게 언니는 32살 되는 남자에게, 나는 28살 되는 조폭 같은 사람에게 팔려갔다. 나는 울면서 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언니를 데려가는 남자가 나한테 "가끔 서로 놀러 다닐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그 당시 언니의 나이는 21살, 나는 18살이었다.

 

1998년 8월, 그동안 계속 전화연결을 해 오던 어느 날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며칠 동안을 계속 울면서 언니를 산 그 남자에게 빌었더니 인신매매 꾼한테 물어서 어머니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뚱뚱한 여자(인신매매 꾼)가 중국 돈 2천원을 요구 한다고 했다. 나를 샀던 심술 사나운 남자는 절대로 돈을 내지 못한다고 했고 결국 언니 네가 그 돈을 다 주고 어머니를 데려 오기로 했다. 딸이 어머니를 돈을 주고 사야만 하는 천하의 비극이 빚어진 것이다.

 

어머니가 오신다고 한 그날. 우리는 철려에 처음에 와서 머물렀던 그 집에 갔다. 한식경이 지나서 택시(봉고차)가 왔다. 봉고차 문이 열리더니 전에 본 기억이 있는 그 여자가 내렸고 뒤따라 어머니가 내리셨다. 두 달 동안 어머니의 앞  머리가 완전히 하얗게 되어 버렸고 눈꺼풀이 축~ 쳐져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또 다른 여자가 내렸다. 아~ 큰 언니였다.

 

우리 4 모녀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조용한 방으로 우리는 들어갔고 큰 언니는 도대체 어떻게 만났으며 그동안 어떤 일들이 생겼는지를 물었다. 어머니는 우리와 헤어진 그 후 일을 얘기해 주셨다.

 

앞서 가던 차를 뒤로하고 엄마 차는 잠깐 머물렀던 연길시내 집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엄마는 통곡을 하시면서 우리한테 보내달라고 하셨지만 헛수고였다. 이 인신매매꾼들이 둘째언니와 나를 팔아먹으려고 하는데 늙은 엄마가 딸리면 돈 받는 액수가 많이 줄어들기에 어머니를 빼 돌렸던 것이다.

 

우리와 생이별을 당한 어머니는 며칠 동안을 밥도 먹지 못하고 우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소설책에서 '하루 밤 사이에 귀밑머리가 하얘졌다' 는 말이 그냥 소설속의 말인 줄만 알았는데 정말 이틀 만에 앞머리가 완전히 하얗게 되더라."며 말했다.

 

그렇게 3일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가 지내고 있던 그 집 문을 벌컥 열며 큰 언니가 울면서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엄마와 큰 언니는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그 후 부터는 정말 둘이 꼭 붙들고 밤에도 서로 떼어 놓고 팔아 먹을까봐 두 달이 넘도록 밤잠도 바꿔가며 서로를 지켰다는 것이다.

 

먼저 두만강을 건넌 언니의 사연

 

큰 언니의 회상은 도강을 해서 중국으로 오니 상황은 북한에서 듣던 것 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도강을 할 때 국경 경비대원들에게 잡혀서 돈을 주고 빼냈으니 그 값을 하라는 것이다. 하루 내내 그 집 지붕 위(우리가 숨었던 곳)에서 숨어 있다가 그 다음날(우리가 중국으로 들어오기 전날) 큰언니는 한 남자한테 팔려서 조선족들이 없는, 완전히 한족들뿐인 동네로 팔려갔다.

 

가는 도중 언니를 산 그 남자는 언니에게 생전 보지 못한 맛있는 빵과 음료수를 건넸다. 동생들 생각과 엄마생각이 나서 남자가 주는 빵과 떡, 맛있어 보이는 사탕과 바나나. 주는 대로 종이 가방에 넣어 챙겼다. 북한으로 돌아갈 때 엄마와 동생들한테 주려는 것이다.

 

10여 시간동안 차를 타고 달린 끝에 그 집에 도착했다. 남자는 언니가 지낼 방은 따로 주었다. 그 방에서 언니는 너무 무서워 바들바들 떨었다. 10여 시간을 달렸다면 그만큼 북한과도 떨어졌다는 것인데 도대체 돌아 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밤 10시가 넘어서 남자가 언니 방으로 들어왔다. 그 남자가 언니한테 다가오자 언니는 무릎을 꿇고 "제발 다가오지 말아 달라."고 울면서 빌었다.

 

얼굴도 선하게 보였지만 마음씨조차도 착한 그 남자는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 하고 서더니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 누가 당신을 건드릴 사람이 없다"며 나갔다가 밥상을 챙겨 다시 들어왔다가는 놓고 그냥 나가 버렸다. 안도의 숨을 내 쉬고 그때에야 방을 둘러보는데 <+>십자가 하나가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비는 방식도 모르면서 온 밤을 빌었다.

 

그 다음날 창문을 내다보았다. 2층짜리 집이었는데 꽤나 잘 사는 집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밑 담장 오른쪽에 작은 대문이 있는 것이 보였다. 쇠고랑으로 담과 대문사이를 걸어 놨는데 공간이 넓었다. 그날 저녁도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 제발 도와 달라고....

 

새벽 6시쯤 날이 밝기 시작하자 언니는 몰래 계단을 내려와서 뒷문을 이용하여 작은 대문 쪽으로 막 달려갔다. 그때까지도 언니의 손엔 먹지 않은 빵과 우유, 과일들이 담겨져 있는 종이가방이 들려져 있었다.

 

대문을 간신히 벗어나니 방법이 없었다. 조선족 같이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새벽이라서 그런지 사람들마저 별로 많지 않았다. 큰 길로 막~ 달려가서 사람 오기를 기다리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을 흘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뒤쪽에서 "아줌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홱~ 돌아섰는데 조선족 아줌마가 서 있었다.

 

언니는 무작정 왕, 왕 울면서 "도와 달라" 고 " 살려 달라"고 그 아줌마의 발목을 붙들고 엎드렸다. 아줌마는 사람들 시선이 있을까봐 얼른 언니를 일으켜 아직까지 인적이 없는 골목에 데리고 갔다. "어디서 왔냐?"고 묻는 아줌마에게 사실대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중국에 처음에 와서 들렸던 길진 지대의 그 집 주소를 건네주면서 이 곳 까지 택시 좀 태워달라고 했다. 그 곳 까지만 가면 택시비는 꼭 드린다고 언니는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되어 다시 두만강 연선에 있는 길진 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집으로 돌아온 언니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러자 집 주인이 엄마와 우리가 벗어 놓고 간 옷을 건네며 가족이 연길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순간 언니는 집 주인에게 귀뺨을 때렸다.

 

"이 날 강도, 돈 밖에 모르는 놈들, 내가 이곳까지 왜 왔는데? 이 빵이랑, 사탕 왜 여기까지 들고 왔는데? 북한으로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을 내 동생들에게 줄려고 했단 말이야." 언니는 그 종이 가방을 내 던지고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이곳에 오면 안돼요. 이 중국 땅에 오면 안돼요. 내가 돌아간다고 했잖아요?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 날은 엄마와 둘째언니, 그리고 내가 연길 쪽으로 들어 간지 겨우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그렇게 우리 네 모녀는 서로 하루, 이틀을 사이에 두고 서로 엇갈림과 엇갈림 속에 운명의 장난처럼 지나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눈물 범벅이가 된 채 붙들고 울었다. 큰 언니는 나를 끓어 안고 울었다. " 미안하다. 막내야. 이 언니 때문에 사회생활도 못한 네가 이런데 까지 팔려오게 되었구나." 나도 그동안 받았던 수치스러운 일들이 떠올라 엉엉, 울어버렸다. 그렇게 그 곳에서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의 설음을 마음껏 만끽하며 4년 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중국에서 4년, 한국행을 택하다

 

2002년 10월 KBS 위성방송뉴스에서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가려고 몽골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가는 게 보도됐다. 우리도 엄마에게 한국으로 가자고 졸랐다. “이곳에서 국적도 없고 계속 쫓겨 다니며 사는 게 너무 힘들잖아요. 엄마 우리도 한국가요.” 큰언니의 의견으로 며칠 동안 고민 끝에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철려 ↔ 북경 행 기차를 타고 우리는 북경으로 갔다. 도착하니 조선글로 <영사관 근처 민박입니다.>, <하루에 50원. 싼 민박집입니다.> 라는 팻말들을 들고 서있는 조선족들이 정말로 많이 나와 있었다. 그 중 우리는 한국영사관에서 가장 가깝다는 민박집을 하나 선택했다. 집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우리는 한국영사관 위치를 집 주인한테 물어서 찾아갔다. 물론 불필요한 짐들은 집에 놔둔 채로 주인집 눈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영사관 앞에 도착해서 동정을 살피던 우리는 다시 한 번 긴장해졌다.  영사관 건물 출입문은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이었다. 두 명의 공안이 지키고 있는 바깥쪽 큰 철문에도 한사람 이상이 들어 못 가게 아주 조금만 열어놓고 있었다.

 

공안 4명, 그리고 그 철문에서 100m 도 되나 마나한 거리에 110(공안)차 두 대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바깥 철문에서 1차적으로 서류검사를 하여 들여보내면 영사관 출입문 앞에서 두 번째 검사를 받고서야 들어가는 것이다.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태연한 척 하면서 아무리 살펴도 조금도 중국 공안들이 자리를 비우는 때가 없었다. 우리가 계획하고 예상했던 그 외로 경비가 너무 삼엄했다. 두 번째 날 오전 9시가 좀 넘어서 우리는 또다시 영사관 앞에 갔지만 하루 종일 또 허탕을 쳤다. 민박 값도 물고 아침저녁은 민박집에서 대 주지만 점심은 우리가 해결해야 하다 보니  점점 수중에 든 돈이 줄어들어 내일까지 버틸 돈 밖에 남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만 포기 하자고 하셨다. 붙잡히는 날에는 가족 모두가 북송 당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한국에 가려고 영사관으로 들어가다가 잡혔으니 우리는 분명 총살 감이었다. 세 번째 날 아침 둘째언니가 눈을 뜨더니 이상한 꿈을 꿨다고 했다. 꿈에 커다란 말 한 마리가 그 좁은 영사관 대문을 유유히 걸어 들어가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간만에 조용히 웃었다. 이유는 둘째 언니가 '말띠'였던 것이다.

 

네 모녀는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그 어떤 신에게 서로 손을 잡고 빌었다. 민박집에서 몰래 소금 한줌을 가져다가 그 집을 나오면서 뿌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영사관 앞으로 왔는데 그날도 경비는 마찬가지로 엄했다. 만약에 들어가려고 해도 큰 정문은 통과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서류가 필요하다. 그때 내 수중에는 가짜 신분증이 있었기에 영사관 앞에 있는 각종 서류들을 파는 매점 집에 들어가서 뭔지 모를 서류를 산 후 구입한 갈색서류봉투에 넣었다.

 

점심시간이 거의 되자 정문에 있던 공안 4명중 두 명이 밥 먹으러 들어갔다. 정문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골목에서 큰언니가 말했다. "엄마 정숙이와 내가 기회를 봐서 먼저 서류를 들고 들어갈 테니 엄마와 둘째가 뒤 따라 들어오세요. 더 이상 끌 수가 없어요. 지금이 기회예요." 라고 말하더니 성큼 성큼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공안 4명과 사투를 벌여 영사관으로 뛰어들다

 

가짜서류는 큰언니가 들고 나는 내 신분증(가짜)을 들고 뒤를 따랐고, 둘째 언니와 어머니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좀 떨어져서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정문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공안들 앞에 다가 갈수록 나는 내 가슴에서 뛰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다리가 떨렸다. 큰언니가 먼저 공안들 앞에 다가갔다. 두 공안남자는 언니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순간 언니는 나를 돌아보며 동생한테 서류는 다 있다며 무작정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공안들은 그제야 긴장한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서류들을 내 밀어 주고는 확인하고 들어가라는 공안들의 말을 뒤로 한 채 언니 뒤를 따라 거의 뛰다시피 들어갔다.

 

두 공안이 “니믄 짠저~(너희들 서라~)” 하면서 허둥지둥 달려왔고 언니와 나는 건물 쪽으로 뛰어갔다. 대문과 건물 사이는 불과 20m도 안 되는 거리, 그런데 그 마당이 10리 길 같이 길게 느껴질 줄이야.

 

대문 쪽 공안들은 거의 우리를 따라왔고 그쯤 되니 영사관 출입문 쪽에서 경비 서던 두 공안남자(둘 다 키가 180도 더 되어 보였다.)가 긴장한 상태로, 다가오는 우리를 보고 있었다. 언니가 거의 뛰는 걸음으로 먼저 다가가니 “어디서 무슨 일로 왔냐”고 중국어로 물었다. "한국 가는 거 신청 하.." 언니는 말을 얼버무리며 두 공안을 밀치며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거의 동시에 두 공안들을 밀쳤지만 잡히고 말았다. 벌써 대문 쪽에서 온 두 공안까지 합쳐서 언니에게 두 명, 나에게 두 명씩 달라붙어 몸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는 영사관 안에 대고 "살려 달라."고 소리치며 공안들의 손 안에서 벗어나려고 젖 먹던 힘까지 썼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남자 두 명도 나를 힘 있게 밀어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막 싸우는 동안  큰언니가 공안들 손안에서 풀려 영사관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싸우는 동안 빈 공간을 이용해서 엄마와 둘째언니까지 먼저 들어가는 것도 보였다. 큰언니까지 놓치다 보니 네 공안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고정된 출입문 끝을 잡고 있었는데, 이제 조금만 힘쓰면 안으로 들어 갈수 있었는데 네 남자가 달려드니 나는 점점 밖으로 밀려 나갔다.

 

나는 "도와 달라."고 막 소리를 질렀고 그때에야 정신을 차린 엄마와 두 언니가 나를 발견하고 다시 달려와 공안들한테서 나를 빼내려고 엄마는 한 공안 머리끄덩이를 잡고, 두 언니는 공안들을 막 물어뜯었다. 순간 내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짧은 단 한 순간, 공안들이 나를 놓아버린 것이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건물 안으로 쓰러지다 시피 뛰어 들어가는데 아~ 분명 한국 사람이었다. 중국 사람들 보다 피부색도 맑았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멋진 남자가 로비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이 성공해서 들어오면 보호는 해 줄 수 있는데 그 전까지 영사들은 한 · 중과의 관계 때문에 섣불리 돕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한테까지만 가면 나는 산다는 생각이 순간 뇌리에 박혔다. 그쪽으로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다. 우리 네 모녀가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주저앉아 왕, 왕 울어버렸다. 그때 바깥쪽에서 사이렌소리가 들리더니 밖은 벌써 중국공안 차들이 와 있었고 공안들은 영사관 안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중 한명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막아 놓고 검열을 했다.

 

영사님은 내 등을 다독여 주면서 일단 진정하라면서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북한에서 왔다”고 울면서 말하니 조사실로 안내했다. 점심시간이라 냉면 4그릇을 들여보내줬는데 누구도 얼음이 띈 맛있어 보이는 그 냉면을 먹지 못했다.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대문 쪽에서부터 로비까지 들어오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3분도 되나 마나한 시간이었지만 내 일생에서 최고로 긴 시간이었다. 그때 그 후유증으로 나는 며칠 동안은 대문에서 건물 앞까지 갔던 것은 기억했지만 로비까지는 어떻게 들어갔는지? 그 다음일은 기억을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끔찍한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한쪽 발을 지옥에 넣고 시도했던 사건이었다. 우리가 들어오던 그날인 2002년 10월 25일 점심시간 이후로는 영사관 전체가 문을 닫고 업무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렇게 자유를 찾기까지 간고한 시련을 겪었다. 21세기 개명천지에 이러한 죽음을 넘나드는 생의 도박을 감히 모녀 4명이 담차게 겁 없이 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담과 이악함이 다시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의지가 강하고 한국정착에서도 두려운 것이 없는 것 같다.

 

앞으로 통일이 되는 날까지, 아버지를 만나는 날까지 우리가 걸어온 그 길이 헛되지 않게 열심히 살자고 우리가족은 모여 앉으면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