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할 때의 그 열정, 자기계발에 바쳤더라면"
"위대한 수령님의 권위를 백방으로 옹호보위하여야 한다." 아직도 노동당에 입당할때 외웠던 10대원칙 구절이 눈에 삼삼하다.
남한에서 매해 10월 10일을 맞을 때면 북한에서 노동당에 입당하기 위해 뛰어다니던 생각이 나곤 한다. 물론 나뿐 아닌 노동당 출신 탈북자들도 동감이라고 생각한다. 이날을 맞는 당원출신 탈북자들의 감회는 씁쓸하다.
당원의 영예를 지니기 위해 바친 시간과, 열정, 믿음 이러한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허무감 때문이다. 대체로 10년간의 군대복무를 지내고 당원이 되었던 사람들은 젊음의 10년을 고스란히 ‘수령옹호’을 부르짖으며, 값없이 흘러 보냈다.
그토록 심혈을 바쳐 쟁취했던 당증을 고향집 소나무 밑에 묻고 온 사람도 비단 나 혼자뿐이 아닐 것이다. 특별히 노동당 6차 대회가 열린 1980년 10월 10일 입당한 나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수 밖에 없다.
나에게 있어 당증은 10년 동안 언 땅에 배를 붙이고 총을 잡고 얻었던 소중한 것이었고, 제대 후 탄광으로 무리 배치되어 원한이 되었는가 동시에 온 가족의 파멸을 초래했던 원한의 물건이기도 하다.
남한에 나와 항상 생각하는 것은 “좀더 일찍이 자유를 알고 입당할 때의 그 열정을 자기 개발에 바쳐졌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았겠는가”고 가끔씩 생각하곤 한다.
지금도 거리에서 책 배낭을 메고 향학열에 넘쳐 오가는 대학생들을 보면 몹시 부럽다. ‘배움의 자유가 있는 저 애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다.
43살에 남한에 입국한 나는 배울 나이가 지나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대학 졸업장이 필수인 남한사회에서 내가 일할 곳은 생산직이나 기능직밖에 없다. 김일성, 김정일 혁명역사가 교육과정의 절반을 차지하는 북한의 학력을 가지고 정보화 지식사회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남한의 대학강단에 서있는 내 나이 또래의 유명한 교수나 학자들을 볼 때마다 부럽고, 너무도 잃은 것이 많다는 허무감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다.
‘승리전망대’에 올라 나의 옛 근무지를 바라보다
나는 17살에 군에 입대했다. 군사 분계선 최전방 초소인 북한군 1군단이 주둔한 철원군 유정리가 나의 첫 군복무가 시작되고, 마쳐진 곳이다. 남한에 나온 후 내가 제일 먼저 가본 곳은 강원도 철원군 ‘승리 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올라 나의 옛 초소를 바라보았다. 굽이진 산골짜기, 그곳은 나의 젊음을 삼킨 곳이었고, 내가 당증을 따기 위해 바친 10년의 땀이 스며있는 곳이다.
동기(冬期), 하기(夏期)훈련은 말할 것도 없고, 수백 마리의 토끼를 키우고, 마당을 청소하는 등 마른일 궂은일을 가리지 않았다. 오직 조선노동당원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에서였다.
그 결과 나는 군단장 감사표창을 받았고 전사영예훈장 1급을 수여 받았다. 가장 기뻤던 일은 내 또래 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입당할 때였다. 당증을 받아 안던 첫날밤 나는 “드디어 부모님 기대에 부응했구나” 하는 성취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 입대해 낙동강까지 나왔던 우리 아버지는 그간 열심히 북한체제를 위해 일해온 열성 당원이었다. 군대 나오던 날 아버지는 “형식아, 사람이 구실을 하자면 당에 꼭 입당해야 한다. 당에 충실하고, 수령님을 잘 받들어야 사람이 사는 보람이 있다.”고 가르쳤다.
군 복무를 하는 기간 고향서 온 편지마다 “상관의 말 잘 듣고, 입당을 꼭 하고 와야 한다.”고 훈시하곤 했다. 그러한 아버지의 기대와 바람을 이루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당시 북한에서 성공을 꼽으라면 첫째가 노동당원이고 다음이 대학, 훈장, 직위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남자는 물론 여자들도 입당하기 위해 군복무를 했다. 입당해야 간부로 등용될 수 있고, 앞날이 보장되는 것이다. 북한주민이라면 노동당 입당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고, 비(非)당원은 사람구실 못하는 스라소니 취급을 받는 풍조였다.
남한은 정당활동의 자유가 있어 어떤 당에 들어가는 가 하는 것은 본인 마음이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다. 노동당이 유일정당으로 되어 있는 북한에서는 당이 사회의 모든 활동을 지휘한다.
경제, 국방, 사회단체 등 사회의 모든 부분을 노동당이 틀어쥐고 있다. 기관마다 노동당 위원회가 조직되어 사실상 기관책임자보다 권위가 더 강해 모든 기관활동의 조직하고, 인사권을 행사한다.
때문에 당위원회 비서들의 권한은 대단히 강하다. 누구나 당비서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권력이 모든 재부와 명예를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비당원은 일생 노동자나 농민으로 살수 밖에 없다. 작업반장이나, 세포비서도 비당원이 하는 예는 없다.
90년대 중반 이후 당원선호도가 재산의 선호도로 바뀌긴 했지만, 당시는 당원이 아니고서는 결혼도 할 수 없다. 여성들이 배우자의 첫째 표징을 당원, 군대복무, 대학졸업 순위로 꼽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비당원들은 연애할 때 여성들이 당원이냐고 물으면, 차마 입이 안 떨어져 “비 오는 날 당에 입당했다”고 하는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해야 했다.
김정일 '방침제대'에 걸려 탄광으로
이렇게 노동당원으로 첫 스타트를 떼고 잘 나가던 내 인생에 찬 서리가 내린 것은 87년 ‘방침제대’에 걸려든 때부터다. 방침제대란 김일성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제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안주탄광을 현지지도 하던 김정일이 “왜 석탄을 못 캐는가?”고 묻자, 탄광일꾼들이 “탄을 캘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김정일은 “그럼 내가 제대군인 1만 명을 보내주겠으니, 석탄생산을 늘이라”고 지시한 것이 우리 나이또래들을 탄광으로 뽑은 ‘방침제대’의 동기라고 한다.
‘방침제대’에 따라 제대명령서를 받은 나는 처음 탄광일이 그닥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같은 또래의 500여명과 배치된 것은 평남 덕천탄광이었다.
탄광마을의 환영을 받으며 탄광 골안에 들어선 나는 아연 실소하고 말았다. 온 탄광마을이 까맣고, 게딱지 같은 오막살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산허리를 보며 “과연 내가 여기서 두더지가 되고 마는가?”하는 실망감 때문이었다.
당적(黨籍)을 등록하기 위해 탄광 책임비서를 만나러 갔더니 “당의 부름에 물불을 가리겠는가”며 우리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3개월간 굴진공으로 일하던 나는 어느 날 실망스런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나와 함께 배치됐던 평양시당 모 간부의 아들과 평남도 행정위원회 간부집 자식들이 대학을 핑계로 탄광에서 빠진 것이다.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전부 대학에 갔다는 것이다. ‘방침제대’는 김정일의 방침이어서 누구도 빠질 수 없거니와 빼준 간부도 처벌 받게 되어있다. 그런데 일도 안하고 계속 빈둥대던 애들이 ‘모범 탄부’가 되어 대학 갔다니 화가 치밀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탄광에서는 노후한 굴진설비와 장비들로 인해 인명사고가 연발했다. 또 쌀 공급도 중단됐다. 10년 동안 나라를 지키고 탄광에 배치된 것만도 억울한 일인데, 언제 어떻게 나도 죽을 지 모를 일이었다. 또 여기서 일생을 썩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권력가의 자녀들은 권력을 등대고 유유히 빠져나가고 돈이 없고, ‘빽’이 없는 노동자의 자식들만 남게 되는 것이다. 나는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고향 뒷산 소나무 밑에 당증을 묻다
나는 당위원회를 찾아가 고향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자 당 지도원은 나를 ‘방침 태공분자’(당의 방침에 따르지 않는 태만하는 자)로 몰아 전체 직원회의에서 비판했다.
원래 ‘방침태공자’들은 마땅히 엄한 처벌을 받고 추방되지만, 탄광에서는 더 한 심한 곳으로 보낼 데가 없었다. 한달 동안 일하던 나도 무기한 버티기로 들어갔다.
나는 머리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병원에 3달 동안 드러누웠다. 환자증명서를 떼면 사회보장자로 등록되어 탄광을 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회보장자로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6개월 동안 머리를 싸매고 병동에 묻혀 있었지만, 사회보장자로 넘기지 않았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가고 싶어도 당적을 떼어주지 않아 주저하게 된다. 직장을 무조건 다녀야 하는데, 직장 다니면 무조건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 이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으면 법 기관에서 체포해 강제노동에 처한다. 이것이 북한당국이 주민들을 조직생활에 매워 놓고 유지하는 체제관리 방법이다.
다른 직장으로 옮기자고 해도 가장 큰 골치거리는 당적문제다. 당위원회는 당적을 떼어주지 않았다. 결국 10년 내가 청춘을 바쳐 얻은 당증이 나를 마소처럼 묶어놓은 올가미였다. 당원은 규약상 보름 동안 당 생활을 하지 않으면 자동 출당된다.
그러던 95년 말, 갱안에서 가스폭발로 수십 명이 질식사 했다. 나는 도저히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당적이고 뭐고 다 버리고 고향인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안전부(경찰)에서 방침을 어기고 도망쳐왔다고 단속했다. 미래가 없는 나는 드디어 중국으로 탈북하기로 결심했다.
떠나던 날, 나는 그토록 원한 서린 당증을 안고 고향 뒷산에 올랐다. 양심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당원이 뭐야? 결국 독재자의 들러리 아닌가? 내가 왜 이 당증 하나에 목을 매야 하는가?” 이렇게 결심한 나는 소나무 밑을 파고 당증을 파묻었다. 청춘도 세월도 함께 묻었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다음날 나는 중국을 향해 떠났다.
2년 만에 5백 원, ‘나라 없는 백성, 상갓집 개만도 못해’
떠나던 날, 아내와 세 살짜리 딸애에게 돈 벌어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약속했다. 아무래도 생소한 길이니, 가족이 함께 떠났다가 변을 당하지 말고 내가 먼저 중국에 가 자리를 잡은 다음 데리러 오겠으니 그때까지 살아 있어줄 것을 당부했다.
나는 하루 종일 왕재산에 올라 길을 익혀두고 국경수비대의 초소위치도 알아놓았다. 3월 말에야 얼음이 풀리기 시작하는 두만강은 몹시도 차가웠다. 물에 들어서는 순간 금방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물살이 빨라 미끄러지면서 둥둥 떠내려갔다.
옷을 입은 채로 떠내려가던 나는 허둥지둥 중국 쪽 대안에 붙는데 성공했다. 밖에 나오니 온몸이 얼어 들기 시작했다. 이발이 덜덜 떨리고 얼어 죽을 것만 같아 겁도 없이 중국인이 살고 있는 집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중국인부부의 도움으로 겨우 옷가지를 주어 입고 북쪽으로 행방 없이 들어갔다. 약 60여리 산발을 타고 간 곳은 왕청현의 어느 한 농촌마을이었다.
나는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조선족 집주인으로부터 일년에 2천원(한화 약 26만원)을 받기로 하고, 땅 7정보를 가꾸어 주었다.
옥수수와 죽도 못 먹는 북한과 달리 중국에서는 밥은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돈 벌기는 엄청 힘들다. 중국인들은 탈북자들이 신분이 없다는 것을 약점 잡아 일 시키고도 돈을 주지 않았다.
3년째 되던 날 나는 주인에게 “집으로 가겠으니, 돈을 좀 달라”고 말했다. 그 조선족은 한해만 더 하면 한꺼번에 6천원을 주겠다고 말하며 나를 더 붙들어 두고 보낼 작정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일하기 싫어하고 마작과 카드로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는 건달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항상 빚에 쫓겨 다니는 그 사람을 믿어봤자, 돈을 받을 것 같지 못했다. “주인님, 북에 있는 가족이 굶어 죽을 것만 같아 그러하니 결산을 좀 해주시오”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남의 나라 땅에 와서 큰소리 한번 변변히 치지도 못하는 신세다. 주인과 다투기라도 하면 당장에 공안에 체포될 수 있었다. 나는 다음해에 다시 오겠다고 거짓말을 남기고 겨우 인민폐 500원을 받아가지고 2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향했다.
파탄된 가정, 노동단련대에 끌려가
그나마 가족을 먹여 살리게 되였다고 고향집 문을 열었건만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랴, 나를 목마르게 기다리던 어머니는 1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아내와 어린 철부지 자식은 어디론가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아~ 내가 죽일 놈이로구나! 가정 하나 벌어 먹이지 못하는 내가 장가는 왜 갔나?”
나는 허둥지둥 나라의 방방곡곡을 다 뒤지기 시작했다. 주위친구들은 내 아내를 평남도 순천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황해도에 쌀 장사를 나갔다는 사람도 있었다.
순천역으로, 함흥역으로 아내가 있을 만한 곳은 샅샅이 뒤졌다. 9.27상무(꽃제비 수용소)의 장부책은 또 얼마나 뒤져보았는지, 그러나 그 많은 어린이 중에서 어떻게 내 딸을 찾을 수 있으랴?
허탈한 마음을 안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마을보위부지도원이 들어서는 것이다.
“야, 형식이, 너 오랜만이다. 그새 어디에 가있었어?” 보위원은 이미 내가 중국에 넘어갔던 사실을 다 아는 양 눈초리는 매서웠다.
바닷가에 조개 잡으러 갔다가 돌아오니 아내가 없어 찾아 다녔다고 진술했다. 그러자 보위원은 무작정 나를 보위부 구류장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2년 동안 어디에 가있었는가? 어디서 다 알아가지고 왔는지, 내가 언제 두만강을 넘었고, 언제 북한에 들어왔는가 하는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더 뻗대봐야 구류장에 앉아 고통스럽기만 하고 쉽게 풀어줄 기미는 아니다.
나는 “돈 좀 벌러 중국 왕청에서 일하고 겨우 300원만 가지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보위원은 중국에 나온 한국사람들을 만난적이 있는가, 교회에 갔던 적은 있는가 등등 물어보고 순수 농사일만 하다 왔다는 내 진술을 믿었는지, 안전부로 넘겼다. 보위부에서 문초를 받으며, 비판서도 두툼하게 썼다.
다음 안전부에 넘겨진 나는 다시 3달동안 취조를 받고 노동단련대에 끌려갔다. 6개월간 고역을 치른 다음 다시는 중국으로 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겨우 풀려났다.
‘내 딸아 꼭 살아있어 주렴’
사회에 나오니 친구들은 나를 멀리하고 마을에서는 ‘조국반역자’라는 딱지를 붙여 감시하기 시작했다. 당생활을 2년 넘게 하지 않은 나는 자동 출당되었다. 당세포비서는 나를 찾아와 당증을 당위원회에 바치라고 통지해왔다.
아내와 딸을 잃고 빈집에 홀로 누워있던 나는 미칠것만 같았다. 눈앞에는 배고파 우는 어린 딸의 모습이 자꾸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 고향 땅, 북한에서는 살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중국으로 2차 탈북했다. 그때부터는 한국으로 나갈 계획을 세우고 연길시내로 들어갔다. 우선 한국인 교회의 소개로 같은 동료 탈북자들이 모여 일하는 작업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돈을 벌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제나 저 제나 한국으로 갈 날을 기다렸다.
약 2개월이 지나자 선교단체에서 제 3국으로 탈북자들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태국까지 열차로, 태국에서 한국대사관까지, 그리고 탈북자 보호시설에서 그야말로 드라마와 같은 해외생활을 시작했다.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 이륙하던 순간 온몸이 공중에 뜨는 것과 같은 전율을 느끼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너무 고생스러웠다. 그리고 너무 야속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가정도 잃고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어야 했나?
한편 이제 그 고생을 다 딛고, 사람답게 자유롭게 살수 있는 미래의 땅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탁 풀어진 것이다.
꺼이 꺼이 나를 보며 친구들은 “한국에 나가 돈을 열심히 벌어 아내와 딸을 찾아오면 돼지 않는가”며 위로한다.
한국에 나온 지 3년 동안 나는 억세게 살아왔다.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건설장에서, 청소부로, 전단지 돌리기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한편 내가 살던 북한 집에 사람을 띄어 아내가 돌아오지 않았는가를 알아보고 있다.
날 만나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죽도록 미안하다. 그래서 한국에 데려다 남부럽지 않게 입히고 먹이고 내세우고 싶다. 그러나 아내가 어디로 갔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근 8년 동안 갈라진 그가 살아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생각해보면 결혼할 때 당원이었던 나를 끔찍이 존대하며 일생을 맡겼던 아내를 내 자신이 스스로 지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남한의 어린애들을 볼 때면 딸 생각에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내 딸애도 살아있으면 저 나이쯤 되었을 텐데….제발 죽지 말고, 살아나 있어주었으면….”이런 기도를 자주 한다.
그래서 10월 10일이 되면 당증 생각이 더 나는 것 같다.
허영식(43세, 2003년 입국)




잘보았읍니다 눈물이납니다